헐리우드산 뱀파이어 영화에 익숙해있던 나에게 스웨던에서 날아온 뱀파이어 영화 "렛미인"은 낯설음과 함께 묘한 신비로움으로 다가왔었다. 뱀파이어가 등장하는 영화면 공포스러워야 한다는 인식을 깨고, 아름답고 서정적인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도 좋았고, 이엘리와 오스칼과 기차를 타고 떠나는 장면에서 보여지는 묘한 슬픔은 긴 여운을 남겼다. 그 여운이 오래도록 머리를 떠나지 않았고, 원작 소설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오래도록 남아 있던 영화의 좋은 느낌이 원작소설로 인해 방해 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일부러 원작 소설을 외면했었다. 하지만, 이엘리의 마법에 걸렸는지 외면하면 외면할수록 이엘리와 오스칼의 사랑을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져만 갔다.
결국 끝까지 외면하지 못하고, 영화를 보고 1년이나 지나서야 원작 소설을 읽었다. 소설을 읽으면서 왜 이제야 이 책을 읽었는지 후회가 밀려왔다. 영화 속에 감독이 관객의 상상에 맡겨 놓은 많은 여백들을 원작은 완벽하게 매워주고 있었다. 이엘리의 과거부터 이엘리의 보호자로 나왔던 남자의 과거까지… 영화 속에서는 이엘리에게 집착하는 그 남자의 모습은 나오지 않지만, 모든 것을 바쳐 사랑했지만 사랑 받지 못하는 그 남자의 집착 그리고 광기까지 알 수 있다. 영화에서 보여지지 않았던 내용을 더 자세히 알기 쉽게 보여주는 소설을 읽다 보니 읽기 전에 우려는 기우였음을 알게 되었다. 오히려 영화를 보고 가졌던 느낌에 소설의 좋은 느낌까지 더해지면서 영화와 소설의 "렛미인"이 내 머리 속에서 하나의 완성된 작품이 되었다.
"렛미인"이 헐리우드 영화로 리메이크 된다고 했을 때, 또 다시 이엘리와 오스카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기쁘기도 했지만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좋은 느낌과 감정이 손상되지 않을까 걱정이 들기도 했었다. 스웨덴 영화의 경우 시나리오 작업을 원작 소설가가 했다고 한다. 그렇게 때문에 원작을 훼손하지 않음과 동시에 원작과의 유기성이 상당히 높은 영화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헐리우드판 렛미인의 경우는 그렇지 못하다. 거기에 미국의 흥행성적이 좋지 않다는 소식은 기대보다는 걱정이라는 감정을 더 크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의 개봉을 계속 기다려온 것은 지난 영화와 소설이 남겨준 긴 여운이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기 때문이지 않을까.
이미 스웨덴 영화를 보고 원작 소설을 이미 읽은 사람은 오리지널과 리메이크 판을 비교하면서 보게 된다. 심리학에 초두효과라는 것이 있는데, 첫인상이 그 사람을 판단하는데 중요하다고 알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처음에 강한 인상 때문에 다음에 들어오는 정보나 이미지는 아무리 좋고 뛰어나다고 해도 처음의 것을 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처음과 계속 비교당하는 운명을 피할 수가 없다. 이 영화를 보면서도 그랬다. 영화의 시작이 스웨덴 영화와는 다르고, 사람의 이름이 다르구나 하는 사소한 것부터… 내용은 이렇게 다르고, 배우의 느낌은 이게 다르고.. 그러다 문득 영화를 감상하는데 방해가 된다는 생각이 든다. 이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 노력한 사람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도.
그래서 영화의 시선을 바꿔 영화를 보려고 했다. 단점이 아니라 이 영화만의 장점이 무엇인지에 집중하려 했다. 장점인지는 모르겠지만, 영화는 인간관계의 단절을 매력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영화 내내 오웬의 어머니 얼굴은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오웬의 아버지는 목소리만 등장한다. 사실 자식과 부모관계 같은 혈연관계는 무엇으로 끊을 수 없다고 말하지만, 영화 속에서는 관계의 단절을 그렇게 묘사하고 있다. 부모들이 착각하는 것 중에 하나가 자기 아이는 부모인 자신이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생각 때문에 자식에 대해서 더 모르는 것이 부모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개인주의가 만연한 미국이라는 사회가 가지고 있는 특수한 상황만이 아니라 자식에 대한 소유욕이 강한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있는 현실이다. 자신의 소유욕과 욕망이 그대로 자식에게 투영하면서 아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부모들이 많은 것이다.
스웨덴 영화에서 이웃들과 주변인물들은 그래도 이웃과의 유대관계라는 틀을 유지하고 있다. 이엘리의 은신처를 급습하는 존재도 이엘리에게 친구와 애인을 희생당한 사람으로 복수를 위해서였으니.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이웃과도 철저하게 단절되어 있다. 오웬이 이웃을 창문을 통해서 몰래 엿보기만 할 뿐이다. 모든 이웃들은 서로에 대해서 무관심하거나 단절되어 있다. 밤에 운동을 하다가 희생당한 이웃이 오랜 시간 동안 보이지 않아도 무관심하고, 남녀의 사랑싸움에 관심을 보이는 이웃도 없다. 오웬이 다니는 학교의 학생이 희생 당해도 슬퍼하는 아이들의 모습보다는 담벼락에 덩그러니 걸린 추모의 문구 뿐. 오히려 학교 학생의 희생 소식을 접하고 모인 강당에서 아이들은 그저 자신의 일을 할 뿐이다. 옆에 아이와 수다를 떨고 장난치기 바쁘다.
영화는 그렇게 단절과 무관심을 강하게 보여준다. 인간사회에서 외로운 존재 뱀파이어와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집에서는 부모의 관심을 받지 못하는 외로운 아이. 서로에 대한 호기심에서 시작해 관심으로 그리고 완성되는 서로에 대한 사랑은 관계와 정에 대한 갈망으로 보이기에 더 슬퍼 보인다. 앨리의 보호자 노릇을 했던 토마스의 비극적인 삶을 통해서 알수있는 절대로 완성되어 질 수 없는 애비와 오웬의 사랑까지 더해지면서 스웨덴 영화와는 다른 느낌을 완성해 낸다. 분명 스웨덴 영화 그리고 원작 소설과 비교한다면 실망스러운 면도 충분히 있는 작품이지만, 감독이 보여주는 색다른 연출감각과 영상이미지는 다른 매력을 충분히 보여준다.
'영화를 보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뮤지컬이 원작인 영화들. (0) | 2010.12.20 |
---|---|
캐릭터의 매력과 연기가 살아있는 로멘틱 코메디 영화. 영화 "김종욱 찾기"를 보고. (0) | 2010.11.30 |
소설과 영화. (0) | 2010.11.23 |
기차와 영화. (0) | 2010.11.15 |
한국형 3D영화의 첫 발. 영화 "나탈리"를 보고... (0) | 2010.10.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