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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고

탐욕과 금융위기. 영화 "월 스트리트 : 머니 네버 슬립스"를 보고.

by 은빛연어 2010. 10. 31.

 불과 1~2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제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사건은 점점 사라지고 있는 같다. 언론들은 앞다투어 종합주가지수 1900선을 돌파를 넘어 황소장으로 가고 있는 듯한 현실을 주목하면서 마치 우리경제가 대단한 회복세 또는 1~2년의 위기 상황을 완전히 탈출한 것처럼 기사를 써댄다. 정부와 경제연구소를 가장한 대기업의 선전꾼들은 자신들의 권위를 바탕으로 온갖 수치를 제시하면서 국민들에게 환상을 계속 심어준다. 그렇게 그들은 위대한 위정자의 지도력과 대기업의 힘으로 지금의 한국경제가 회복하고 있다고 또는 회복을 했다고 사람들을 현혹한다. 앞의 삶이 힘겨운 다수의 서민들은 경제학적을 증명된 적이 없는 낙수효과라는 그들의 거짓된 약속을 믿으며, 그들이 지금 해대는 거짓말에 대해서 어떤 검증이나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대로 믿어 버린다.

 

 단지 1~2 전의 사실도 망각하는 사람들의 기억력으로 사람들이 그렇게 했던 지난 정권의 경제 수치들을 기억이나 있을까? 마치 자신이 대단한 경제의 신이라도 되는 허세를 부리는 지금의 정권보다도 건실한 성과를 보여줬다는 것을. 그럼에도 사람들은 지난 정권에 대해서 경제에 실패한 정권으로 규정하고 가혹한 돌팔매질을 했었던 기억을 하고 있을까? 그런 간단한 기억만 떠올린다면 지금 정부와 대기업 그리고 부도덕한 언론들이 떠들어대는 거짓과 속임수가 우리를 얼마나 기만하고 있다는 것을 바로 있을 텐데. 하지만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요, 권위에 쉽게 굴복하는 계급적 동물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거짓과 속임수에 쉽게 속는다.

 

 어떤 일이나 사건의 반성과 교훈은 누군가가 특정한 사람들이 대신해준다고 생각하는지, 사람들은 깊이 있는 반성도 사건의 교훈이 무엇인지도 진지하게 묻지도 고민도 하지 않는다. 그냥 지금의 현실이 바뀌기만을 수동적으로 바라며, 자신들이 분노를 배설할 출구처만 찾을 뿐이다. 그로 인해 누군가는 과도한 비난을 당하기도 하고, 사람들의 분노를 넘어 저주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언제나 핵심문제는 비켜난 . 인류의 역사를 뒤돌아보면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위기로 인해 끊임없이 고통을 당했고, 지금도 앞으로도 반복되는 위기로 고통을 받고 받을 것이라는 것을 있다. 그저 앞의 현실만 벗어나면 된다는 안이한 생각이 인류 번영이라는 축복이면에 위기로 인한 고통이라는 운명을 지운다.

 

 지금의 세상은 불공평하다. 전문가들조차 실체를 파악할 없는 파생상품에 대한 무분별한 금융회사들의 투자와 그것을 감시 감독해야 기관들의 방관이 만들어낸 지금의 금융위기에 그들은 별다른 고통이 없다. 금융회사의 협박과 회유에 넘어간 정부의 지원으로 그들은 아직도 자신의 부를 유지하면서 떵떵거리며 보너스 파티를 벌인다. 고단한 하루를 보내고 돌아와 편히 있는 집을 원했던 많은 서민들만 길거리로 내몰릴 뿐이다. 물론 자신의 능력과 현실을 벗어나는 집을 원했던 그들도 지금의 위기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가장 고통을 받아야 했고 책임을 져야 했던 금융회사는 지금도 그들의 탐욕을 채워줄 희생양을 찾아서 돈놀이를 하고 있다.

 

 위기 전과 위기 후에도 변한 것은 없다. 힘없고 없는 서민들만 고통 받을 뿐이고, 탐욕스러운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서 힘없는 사람들을 유린한다. 쉽게 망각하는 사람들은 위기를 야기한 원인을 제거하지 않았다. 고통 받았던 현실을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이니까. 그래서 여전히 금융위기를 불러왔던 사람들에게 대해서 우리는 무관심하거나 또는 그래도 방관하고 있다. 어쩌면 이제 어떻게 금융위기가 일어났는지 까먹은 것이 아닐까?

 

 이런 시기에 올리버 스톤의 신작 " 스트리트 : 머니 네버 슬립스" 반가운 작품이다. 우리의 기억 속에서 점점 사라져가는 사건들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할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준다. 거장다운 솜씨로 이번 위기의 중심에 있었던 스트리트를 날카롭게 보여준다. 실제로 있었던 사건의 과정을 빠르게 묘사하면서 복잡한 금융위기의 과정과 안에 숨어 있는 은행가들의 탐욕과 비열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다시금 기억을 기억을 떠올릴 있을 만큼, 뛰어난 묘사를 보여준다.

 

 하지만, 감독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저런 탐욕스러움을 방관했던 사람들에 대해서도 의미 있는 메시지를 던진다. 금융위기의 과정에 대한 묘사에서는 스트리트도 대표되는 금융회사와 금융인들의 탐욕스러움에 대한 실체를 보여줬다면, 이번 위기는 단지 그들 때문에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영화 고든 게코가 강연회에서 "탐욕은 좋은 것이었지만, 이제는 탐욕은 합법이 되었다."다는 대사는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탐욕에 대해서 관대하기 시작했고, 이제는 찬양하기 시작한 우리의 모습의 그대로 보여준다. 자신은 탐욕을 찬양하지 않았더라도 탐욕이 합법이 되는 세상이 되도록 방관했던 우리를 다시금 되돌아 보게 만든다.

 

 그렇게 영화는 초반부터 우리가 성찰하고 반성해야 것들을 매력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중반을 넘어가면서 영화는 방향성을 상실한다. 감독은 휴머니즘적 감동을 영화에 넣으려는 . 가족의 화해와 용서로 방향을 바꿔버린다. 탐욕마저도 넘어서는 것이 가족애라는 식으로. 진부함은 둘째치고 초반에 보여줬던 힘있고 날카로웠던 비판과 묘사에 대해서 관객들이 성찰하고 생각할 기회를 박탈하는 같다. 그래도 망각의 동물인 사람들에게 금융위기의 이면에 숨어 있는 인간의 탐욕과 비열함을 깊이 있게 인식시켜주고 인간의 변화를 요구하기보다는 단지 탐욕보다는 가족이 소중하다는 식으로 영화를 끝내는 같다.

 

 오히려 칼라일의 말이 가족애라는 주제를 넘어 깊은 성찰로 우리를 안내한다. 탐욕으로 파괴되어 가는 것이 개인과 가족이 아니라 사회라는 것을. "우리는 황금 만능주의의 결과 기괴한 귀결에 도달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없다. 우리는 공동사회에서 살고 있다고 말하면서, 공공연히 완전한 분열과 극단적인 소외를 불러 일으키고 있다. 우리의 생활은 서로 돕는 정경이 아니라, 공정한 경쟁이니 하는 미명 아래 지극히 가혹한 전쟁의 법칙으로 뒤덮인 생존경쟁의 아수라장을 드러내고 있다. 우리는 모든 인간관계가 금전지불 관계로 귀착하는 것이 아님을 완전히 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