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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인 심리학에 대한 교양 서적을 보면, 거의 빠지지 않고 소개되는 이야기 중에 하나가 뉴욕에서 살해 당한 키티 제노비스 살인 사건이다. 길거리에서 강도를 만난 그녀가 30분이나 격렬하게 저항하면서 처참하게 살해 당했지만, 이 사건을 목격하거나 인지한 주변 이웃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그녀에게 도움을 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경찰에게도 신고하지 않은 사건이었다. 이 사건이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고 그 이웃주민들에 대한 비난과 점점 이기주의적으로 변해가는 사회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있었다.
하지만,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방관자 효과"라고 주변에 사람들이 많을수록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지 않는 현상이라고 한다. 그녀가 살해 당할 당시에 그 이웃들이 특별히 이기적이고, 무심한 사람들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인간이 가진 기본적인 심리적 현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심리적 함정을 피하기 위해서 도움을 구할 때는 그냥 불특정 다수를 향해서 "도와주세요"라고 말하지 말고, 주변의 특정 사람을 정확하게 지칭하면서 구체적인 도움의 내용을 제시해야 된다고 한다. 예를 들어 "xx씨, 경찰에 신고해 주세요."나 "119에 신고해 주세요" 같은 식으로.
하지만,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방관자가 되기를 강요 받거나, 무의식적으로 스스로가 방관자가 되기를 결정한다. 무력과 폭력에 대한 두려움일 수도 있고, 개인적 이기심의 발로일 수도 있다. 복잡한 사회에서 얽히고 얽힌 사람들과의 관계가 만들어내는 설명하기 힘든 또 다른 이유로 우리는 방관자가 된다. 그렇게 우리는 "방관자 효과"과 설명하는 이유 외에도 다양한 이유로 방관자가 된다.
영화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은 방관자가 만들어낸 잔혹한 사건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복남이 그렇게 믿고 있는 단 한 사람이 마지막 방관자로 돌아서면서 그녀가 경험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절망감, 그것이 바로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표현된 것이다. 그렇게 잔혹하게 사람을 죽이는 복남을 보고, 잔인하다 손가락질 할 수 있을까? 진짜 잔인한 사람들은 복남이 아니라 타인의 위험과 고통에 방관하는 사람들인데.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원인이나 과정보다 결과만을 보고 쉽게 평가를 내린다. 결과만을 보고 상대방을 난도질 하듯이 비난을 퍼 붙는다. 앞선 정황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마치 자신이 대단히 도덕적 우월자인 것처럼 착각한다. 스스로가 세상의 모든 정의의 결정체인 것 처럼. 마치 자신들은 그런 결과의 굴레에 빠지지 않는다는 확실한 믿음이 있는 것처럼.
결과에 대한 1차적인 책임이 당사자에게 있다는 것은 쉽게 부정할 수 없지만, 많은 사람들은 쉽게 개인의 책임이라고 말한다. 사회적 문제나 커다란 사건에 대해서 개인의 책임이 크다는 것이다. 못사는 것도 개인의 책임이고, 청년 실업의 구조적 문제도 개인의 책임이고, 용산 참사로 희생된 분도 전부 개인의 무능과 책임으로 말이다. 요즘 사람들은 개성이라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여기는데, 능력의 차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은 쉽게 납득하지 못한다. 차이에서 나오는 현상에 대해서는 관용하고 이해하며 상호보완 함으로써 서로가 도움이 될 수 있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그래서 남을 짓밟아 가면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마치 자본주의 시장의 원리라고 생각하는 풍토까지 만연한다.
자본주의에서 이익의 추구는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문제는 자신의 행위가 남에게 피해가 간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늘어난다는 것이 아닐까? 자신의 권리는 소중하게 생각하면서 남의 권리를 침해하는 사람들, 그들은 입으로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고 하지만 정작 자신은 책임지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의 대부분은 기업은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 존재하지만, 기업은 사회적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저 기업이 이익을 추구할 자유만을 외칠 뿐이다. 사회적 책임을 망각한 기업들의 횡포로 인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 받는지 전혀 모를 뿐 아니라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상대방의 고통과 아픔을 이해 못하는 사람들이 늘어가는 것은 우리 안에 감정이 매 말라서 일수도 있지만, 가장 큰 문제는 공감의 능력을 상실하기 때문이 아닐까? 요즘은 상대방의 심정을 진실로 이해할 정도의 공감하는 사람을 쉽게 찾을 수가 없다. 지독한 경쟁사회의 냉혹하리만큼 철저하게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틈 속에서 생존을 위해서는 공감이라는 것이 어떻게 보면 거추장스러운 것일 수 밖에 없었기에. 우리는 공감하는 능력을 스스로 거세해 버렸다. 현상에 대한 분석과 해결책을 찾기 위한 것에는 최선을 다하면서 마음으로 공감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정확하게 말하면 공감능력 자체를 잃어 버린 것이겠지만.
그런 사람들은 쉽게 머리로는 "역지사지"란 말을 쉽게 이해한다. 학창시절에 시험점수를 잘 받기 위해서 배웠던 것들이니까. 하지만, 진정으로 "역지사지"를 이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역지사지를 하면 상대방의 상황이나 심정으로 자신을 몰아 넣지 못한다. 단지, 상대방의 외적 상황에 상대방을 몰아내고 대신 자신을 넣어 버린다. "내가 그 사람이었다면"이 아니라 "나라면"이 역지사지라고 생각함으로써 공감이라는 것을 전혀 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많은 남성들은 남성운전자의 교통사고율이 여성운전자의 교통사고율보도 높음에도 불구하고 초보 여성운전자에게 "김여사"라는 비아냥을 날린다. 뿐만 아니라 여전히 여성들이 사회적 차별을 받고 있다는 다양한 통계자료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이 특권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해 여성차별문제에 대해서는 그저 비아냥 거린다.
그렇게 타인의 입장을 전혀 공감하지 못하기에 사회적 갈등은 커지고, 문제의 책임을 단순히 개인의 책임으로 쉽게 돌려버린다. 그렇게 개인의 책임이 강조되면서 사회 전체가 고민해야 될 문제나 현상에 대해서 무관심하고 무책임한 방관자들이 수 없이 늘어만 간다. 복남도 자신의 현실과 문제에 공감해 주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그런 절망감을 보여줬을까?
영화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은 분석하면서 봐야 될 영화가 아니라 공감하면서 봐야 될 영화다. 해원과 복남 두 명의 여성에 모두에게 공감하면서 본다면, 사회적 약자들의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면서 볼 수 있다. 그렇게 두 사람의 입장을 서로 공감하면서 영화를 보다 보면, 우리는 사회적 절망 속에 사는 복남의 더 깊은 슬픔을 뼈 속까지 들여다 볼 수 있게 된다. 그녀가 나쁜 것이 아니라 수 많은 사회적 방관자들이 그녀를 나쁘게 만든 것이고 이해하면서.
잔인함이란 칼로 사람을 난도질해 잔인하게 죽이는 것이 아니다. 잔인함이란 수 많은 방관자가 만들어 낸 헤어날 수 없는 절망이 만들어낸 지금 현실일 수도 있다. 눈에 보여지는 잔인함이 아니라 방관자들의 냉대와 버림 속에 있는 사람들 그 마음에 대한 심정이 잔인함을 드러낸다. 영화는 복남의 절망에 찬 슬픔에 눈물 흘리고, 애원하는 복남을 끝내 외면하는 해원의 잔인함을 보면서 공감하는 능력을 잃어버리고 방관자가 되어버린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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