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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고

핏줄을 넘어서는 가족의 가치. 영화 "에브리바디 올라잇"을 보고.

by 은빛연어 2010. 9. 27.

 개인적으로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요구하는 정조관념에 대해서 쉽게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남성들은 정조관념에 대해서 관대하게 생각하면서 여성들에게는 강요하다시피 하는 걸까라는 의문에 대해 남성우위 사회가 만들어낸 여성에 대한 하나의 억압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최근에 읽은 책에서는 이유를 조금은 유머러스 하면서도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간단하게 말하면 남성은 자녀를 명확하게 자신의 자녀로 인식할 있는 증거가 없기 때문에 대신 여성들에게 정조관념을 요구한다고 한다.

 

 여성은 임신과 출산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낳은 자녀가 자신의 자녀임을 명확하게 있지만, 여성에게 정자만 제공하는 남성의 경우에는 수정된 정자가 자신의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기 위해서 있는 거라곤 여성의 정조에 대한 믿음 밖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요즘이야 유전자 검사를 통해서 쉽게 확인을 있지만, 그렇다고 여성의 정조관념에 대한 남성의 요구는 쉽게 바뀌지 않고 있다. 결혼이라는 제도가 서로의 신뢰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인 것만큼 이젠 여성과 남성 모두에게 정조관념은 하나의 약속이지 않을까?

 

  다음으로 이해가 가지 않은 것이 남성들이 가지는 혈연에 대한 강한 끌림 아니면 집착이랄까? 영화나 드라마 같은 것을 보면 양육의 의무를 다하지 않은 아버지들이 갑자기 나타나 자기 핏줄이라는 이유 하나 만으로 자식들에게 집착하는 것을 있다. 자신의 유전자를 보존하려는 욕구로 인간은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는다고 말하기는 하지만, 여성들은 모성애로 혈연을 넘어서기도 하는 반면에 남성은 유난히 혈연에 집착하는 듯하다.

 

 이름 앞에 존재하는 ()이라는 것도 혈연에 대한 정체성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것으로 특히 우리나라에서 부성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 호주제의 폐지와 함께 () 대한 선택권이 어느 정도 자유로워진다고 했을 , 호주제 폐지에 대한 반발보다 부성체계가 무너짐을 걱정하는 비판이 있었던 것도 남성중심적인 혈연사고 때문이지 않았을까?  유전학적으로 봤을 남성 중심적 혈연체계보다 여성중심적 혈연체계가 올바르다고 말하는 생물학자의 주장을 보면 남성이 가지고 있는 혈연에 대한 집착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그런데, 남성들이 가지는 자기 핏줄에 대한 감정은 우리나라에서만 나타나는 고유의 특징만은 아닌 같다. () 대해 개방적이고, 남성과 여성의 지위가 거의 평등한 선진국에서도 핏줄에 대해서 가지는 남성들의 감정은 우리와 비슷한 것을 보면. 결혼이라는 굴레에 속박되기 싫어하면서도 자기 자녀에 대해서는 끌림이라는 것은 공통된 유전자들이 만들어내는 공명 때문일까? 영화 "에브리바디 올라잇" 보수적인 시선으로는 가족이라고 부를 없는 레즈비언 부부의 가족에 핏줄에 대한 끌림만으로 가족 속에 들어가려는 남자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핏줄의 끌림이 만들어내는 것이 가족이냐 아니면 가족이라는 것은 핏줄 이상의 것으로 이루어진 것이냐가 영화가 보여주는 주제이다. 그렇게 영화는 가족이라는 것이 무엇이냐에 대한 진지한 물음을 던진다.

 

 세상이 많이 변해서 다양한 가족의 형태들이 나타나고 있고, 그러한 변화에 대해서 사회나 구성원들이 느리기는 하지만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고전적 가족관념에 어긋난 가족에 대해 보내던 싸늘한 시선도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과거에 비해서 관용적으로 바뀌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동성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가족에 대해서는 싸늘한 시선이 여전하다. 인간이 만들어낸 하나의 제도인 결혼이라는 제도에서 아직도 그들의 결합을 허용하지 않은 나라들이 많다. 그런 상황에서도 동성가정을 영화 전면에 내세우며, 고전적 가족관념에 대해서 차분하면서도 잔잔하게 도전한다.

 

 그런데 핏줄로 끌리게 되는 감정은 운명이나 보이지 않는 절대적인 같은 것일까? 오랜 시간 떨어져 있던 형제나 부모 자식간에도 서로의 얼굴은 몰라도 핏줄은 끌리게 되어 있어 서로를 알아 있다는 식의 이야기는 너무나 진부하게 들린다. 보통 사람들은 같은 취향이나 같은 심지어 같은 물건을 사용하는 사람에 호감을 가지고 끌리는 경향이 있다. 공통된 주제 만으로도 서로의 공감대가 형성되는데, 하물며 같은 유전자에서 나오는 비슷한 생김새에 끌리지 않는 다는 것은 이상하지 않을까? 핏줄의 끌림은 비슷한 생김새에서 오는 끌림이지 운명과 같은 보이지 않은 절대적 끈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른 환상이지 않을까?

 

 그렇게 보면, 영화 속에서 생물학적 아버지 폴과 아이들을 연결시켜주는 끈은 핏줄이나 운명과 같은 보이지 않는 절대적 끈이 아니라 공통된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로 인한 서로 간의 공감대일 뿐이다. 폴은 그러한 공감대와 호감을 운명적인 감정으로 착각하지만 가족이라는 것은 단순한 공감대나 호감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핏줄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보통 그것 만으로 가족이라는 끈이 형성된다고 생각하겠지만, 가족은 이상의 다른 것이 존재한다. 폴이 결국에 레즈비언 부부 줄스와 그리고 아이들의 가족이 되지 못한 것은 진정한 가족의 결정체를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영화는 가족이라는 것은 오랜 시간에 다져온 신뢰와 믿음이라고 말한다. 폴의 갑작스러운 등장으로 인해서 서로간의 신뢰와 믿음이 흔들리지만, 결국에 폴과 핏줄이라는 가치는 쉽게 단단한 가족의 신뢰와 믿음을 무너뜨리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가족의 가치라는 것은 어떤 구성원과 어떤 외적 관계가 아니라 오랜 시간 탄탄하게 쌓여온 신뢰와 믿음에 기초하고 있고, 혈연이나 운명 같은 것은 우리가 만들어낸 일방적인 믿음 뿐이다. 혈연중심의 가족제도 안에서 우리는 동안 신뢰와 믿음이라는 가치를 소홀하지 않았던가라는 생각이 드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