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남자아이들이 그렇듯, 어린 시절에 로봇관련 애니메이션을 즐겨봤었다. 지금은 공중파에서 애니메이션을 잘 방영해 주지 않지만, 내가 어렸을 때는 공중파에서 매일 애니메이션을 방영해 주었었다. 그 때 봤던 로봇관련 애니메이션은 선악구분이 뚜렷할 뿐만 아니라, 로봇의 개발자들로 뛰어난 과학자들이 등장한다. 주인공 역활은 아니지만 중요한 조력자 역할로 등장한다. 한쪽은 투철한 정의감과 인류애를 가지고 선을 위해서 일하고, 다른 한쪽은 탐욕으로 타락해 권력을 탐하고 인류정복을 꿈꾼다. 이들은 치열하게 로봇의 성능을 업그레이드해 서로의 과학적 능력에 대한 치열한 대결을 펼친다.
어린 시절은 누구나 선악에 대한 뚜렷한 이분법적 구분을 가지고 있어서, 선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믿음을 가지고 좋아하게 마련이다. 아무리 천재적인 과학자라고 하더라도 악으로 구분되는 과학자에 대해서는 좋아하지 않게 마련이다. 그래서 정의감에 투철한 선한 과학자를 동경하면서도 악한 과학자는 혐오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그 시절 만화를 보면서 나도 언젠가는 선한 과학자처럼 되고 싶다는 막연한 동경과 생각을 한번 쯤 가졌었다. 나이가 들면서 현실은 그런 만화속의 과학자나 로봇은 현실에서 실현 쉽게 실현되기 힘들다는 것을 그리고 내가 가진 재능으로는 어림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다 보니 비현실 속에 대한 인물에 대한 막연한 동경은 어느 순간엔가 현실적 인물들에 대한 동경으로 변했다. 모짜르트의 천재적 재능을 동경했지만 또 질투했던 살리에르처럼, 뛰어난 사람들을 동경하면서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질투를 하게 된다. 동경도 잘하고 질투도 잘하는 성격이지만,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가진 천재라고 해도 동경도 질투도 하지 않게 되는 사람들이 있다. 아직 어린시절의 순수함이 묻어서 그런지 몰라도, 이분법적 선악구분으로 선이 아니라 악이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동경도 질투도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이 책을 통해 뛰어난 수학적 재능을 바탕으로 일반인들이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돈을 만지고 버는 천재적 퀀트들을 조금씩 알아가면서도 동경도 질투도 생기지 않는다. 현실에서 돈이라는 놈이 억눌려 살다보니, 돈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그들의 수십억 재산에 잠시 혹하기는 했지만, 그들의 삶이나 직업적 모습은 결코 내 동경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안타깝다는 생각이 우선한다. 책 “미국이 파산하는 날”의 저자 담비사 모요가 “제조업 현장의 일자리 감소는 그동안 이러한 악화의 원인으로 지목됐던 외부의 어떤 경제적 요소보다도 과학과 정보기술, 공학 교육의 미래에 대한 서구의 무관심과더 큰 관련이 있다.”라고 지적하는 것 처럼 퀀트들을 부상은 큰 관점에 봤을 때 결코 유익하지 않기 때문이다. 도박과 탐욕이 넘쳐나며 승자독식이 만연하는 곳에서 어떤 건설적인 미래가 펼쳐지겠는가?.
투기에만 몰두하는 뛰어난 천재급 인재이 뭔가 건설적인 것을 만들지 않고 도박에 빠져든 모습이란. 단순히 그러한 그들의 도박 여파가 자신들에게만 머무른다면 괜찮겠지만, 천재들의 거대한 도박은 상관없는 일반 서민들을 삶까지 뒤흔들어 버리는 파국을 만들어 낸다. 퀀트들을 보면 돈과 도박이라는 놈에 영혼을 팔아버린 것 같다. 자신의 영환을 악마에게 팔아버린 파우스트 같은. 그런데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그들이 단순히 돈과 도박에 영혼을 팔았다고 단순하게 정의할 수 없을 것 같다. 학문적 호시김과 열정에서 시작해 탐욕과 도박에 빠져드는 모습은 사회적 분위기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을 긍정하는 경제학과 그런 경제학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문화가 만연한 현실에서 퀀트들의 등장은 시대가 만들어낸 당연한 결과물이다. 결국에 그들은 자신의 재능을 창의적인 일에 쓰지 않고, 투기와 도박에 모든 열정을 쏟아 넣은 것 뿐이다. 파우스트는 비록 악마와 계약을 했지만 죄책감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다면, 퀀트들은 죄책감은 물론 양심의 거리낌까지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개인의 도덕적 가치와 양심이 시대 정신을 반영하듯 지금 이 시대의 정신은 퀀트들을 긍정하고 그들의 탐욕을 찬양한다.
파울로 코엘료는 “베로나카 죽기로 결심하다.”라는 책을 보면 왕국을 무너 뜨리려는 마법사의 이야기가 짧게 등장한다. 왕국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물에다 마시면 미치는 약을 탄다. 모든 국민이 미쳐버리고 마침내 왕과 왕비만이 남았다. 미친 백성들은 왕과 왕비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성으로 몰려간다. 왕과 왕비는 그 절박한 순간에 자신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약이 든 물을 마시고 같이 미쳐버린다. 그렇게 해서 왕과 왕비는 자신들의 왕좌를 끝까지 지킨다. 파울로 코엘료의 이런 성찰은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과 같다. 탐욕을 경계하고 다른 미덕을 찾는 사람들이 같이 탐욕적이지 않고는 살아가기 힘든 현실. 누가 퀀트들에게 돌을 던질까? 탐욕스럽고 도박에 빠져있는 그들의 모습은 한방 인생을 노리는 우리들의 욕망과 결코 다르지 않다. 영화 “베오울프”의 그렌델이 호로트가르 왕의 탐욕으로 탄생한 괴물이고, 황금용이 베오울프의 탐욕에 의해 탄생한 괴물이듯. 퀀트들도 바로 우리가 만들어낸 경제학과 탐욕이 만들어낸 괴물들이다.
이 책은 한편의 영화를 보듯이 실감나는 묘사로 퀀트들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퀀트들이 야기한 경제 위기을 바탕으로 그들에 대해서 상당히 비판적인 시선을 유지하면서 일반인들이 알지못하는 퀀트들의 세계를 보여준다. 하지만, 이 책의 한계는 퀀트들의 문제를 시장을 수학공식으로 정형화 분석하려는 그들의 행위를 비판하는데 초점이 맞춰진 느낌이다. 괴물 그렌델을 죽이고 영웅이 된 베오울프가 왕의 권력을 차지했지만, 자신의 탐욕으로 더 거대한 괴물을 탄생시킨 것 처럼. 퀀트에게 비판적인 이 책은 단순히 퀀트들만 비판할 뿐, 퀀트들이 탄생할 수 밖에 없는 현실과 우리 안에 괴물에 대해서는 모른채 한다. 결국 그렌델 이후에 황금용이라는 괴물이 탄생한 것처럼 우리는 퀀트 이후에 또 다른 괴물의 탄생을 보게 될지도 모르겠다.
어린 시절은 누구나 선악에 대한 뚜렷한 이분법적 구분을 가지고 있어서, 선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믿음을 가지고 좋아하게 마련이다. 아무리 천재적인 과학자라고 하더라도 악으로 구분되는 과학자에 대해서는 좋아하지 않게 마련이다. 그래서 정의감에 투철한 선한 과학자를 동경하면서도 악한 과학자는 혐오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그 시절 만화를 보면서 나도 언젠가는 선한 과학자처럼 되고 싶다는 막연한 동경과 생각을 한번 쯤 가졌었다. 나이가 들면서 현실은 그런 만화속의 과학자나 로봇은 현실에서 실현 쉽게 실현되기 힘들다는 것을 그리고 내가 가진 재능으로는 어림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다 보니 비현실 속에 대한 인물에 대한 막연한 동경은 어느 순간엔가 현실적 인물들에 대한 동경으로 변했다. 모짜르트의 천재적 재능을 동경했지만 또 질투했던 살리에르처럼, 뛰어난 사람들을 동경하면서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질투를 하게 된다. 동경도 잘하고 질투도 잘하는 성격이지만,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가진 천재라고 해도 동경도 질투도 하지 않게 되는 사람들이 있다. 아직 어린시절의 순수함이 묻어서 그런지 몰라도, 이분법적 선악구분으로 선이 아니라 악이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동경도 질투도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이 책을 통해 뛰어난 수학적 재능을 바탕으로 일반인들이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돈을 만지고 버는 천재적 퀀트들을 조금씩 알아가면서도 동경도 질투도 생기지 않는다. 현실에서 돈이라는 놈이 억눌려 살다보니, 돈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그들의 수십억 재산에 잠시 혹하기는 했지만, 그들의 삶이나 직업적 모습은 결코 내 동경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안타깝다는 생각이 우선한다. 책 “미국이 파산하는 날”의 저자 담비사 모요가 “제조업 현장의 일자리 감소는 그동안 이러한 악화의 원인으로 지목됐던 외부의 어떤 경제적 요소보다도 과학과 정보기술, 공학 교육의 미래에 대한 서구의 무관심과더 큰 관련이 있다.”라고 지적하는 것 처럼 퀀트들을 부상은 큰 관점에 봤을 때 결코 유익하지 않기 때문이다. 도박과 탐욕이 넘쳐나며 승자독식이 만연하는 곳에서 어떤 건설적인 미래가 펼쳐지겠는가?.
투기에만 몰두하는 뛰어난 천재급 인재이 뭔가 건설적인 것을 만들지 않고 도박에 빠져든 모습이란. 단순히 그러한 그들의 도박 여파가 자신들에게만 머무른다면 괜찮겠지만, 천재들의 거대한 도박은 상관없는 일반 서민들을 삶까지 뒤흔들어 버리는 파국을 만들어 낸다. 퀀트들을 보면 돈과 도박이라는 놈에 영혼을 팔아버린 것 같다. 자신의 영환을 악마에게 팔아버린 파우스트 같은. 그런데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그들이 단순히 돈과 도박에 영혼을 팔았다고 단순하게 정의할 수 없을 것 같다. 학문적 호시김과 열정에서 시작해 탐욕과 도박에 빠져드는 모습은 사회적 분위기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을 긍정하는 경제학과 그런 경제학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문화가 만연한 현실에서 퀀트들의 등장은 시대가 만들어낸 당연한 결과물이다. 결국에 그들은 자신의 재능을 창의적인 일에 쓰지 않고, 투기와 도박에 모든 열정을 쏟아 넣은 것 뿐이다. 파우스트는 비록 악마와 계약을 했지만 죄책감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다면, 퀀트들은 죄책감은 물론 양심의 거리낌까지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개인의 도덕적 가치와 양심이 시대 정신을 반영하듯 지금 이 시대의 정신은 퀀트들을 긍정하고 그들의 탐욕을 찬양한다.
파울로 코엘료는 “베로나카 죽기로 결심하다.”라는 책을 보면 왕국을 무너 뜨리려는 마법사의 이야기가 짧게 등장한다. 왕국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물에다 마시면 미치는 약을 탄다. 모든 국민이 미쳐버리고 마침내 왕과 왕비만이 남았다. 미친 백성들은 왕과 왕비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성으로 몰려간다. 왕과 왕비는 그 절박한 순간에 자신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약이 든 물을 마시고 같이 미쳐버린다. 그렇게 해서 왕과 왕비는 자신들의 왕좌를 끝까지 지킨다. 파울로 코엘료의 이런 성찰은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과 같다. 탐욕을 경계하고 다른 미덕을 찾는 사람들이 같이 탐욕적이지 않고는 살아가기 힘든 현실. 누가 퀀트들에게 돌을 던질까? 탐욕스럽고 도박에 빠져있는 그들의 모습은 한방 인생을 노리는 우리들의 욕망과 결코 다르지 않다. 영화 “베오울프”의 그렌델이 호로트가르 왕의 탐욕으로 탄생한 괴물이고, 황금용이 베오울프의 탐욕에 의해 탄생한 괴물이듯. 퀀트들도 바로 우리가 만들어낸 경제학과 탐욕이 만들어낸 괴물들이다.
이 책은 한편의 영화를 보듯이 실감나는 묘사로 퀀트들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퀀트들이 야기한 경제 위기을 바탕으로 그들에 대해서 상당히 비판적인 시선을 유지하면서 일반인들이 알지못하는 퀀트들의 세계를 보여준다. 하지만, 이 책의 한계는 퀀트들의 문제를 시장을 수학공식으로 정형화 분석하려는 그들의 행위를 비판하는데 초점이 맞춰진 느낌이다. 괴물 그렌델을 죽이고 영웅이 된 베오울프가 왕의 권력을 차지했지만, 자신의 탐욕으로 더 거대한 괴물을 탄생시킨 것 처럼. 퀀트에게 비판적인 이 책은 단순히 퀀트들만 비판할 뿐, 퀀트들이 탄생할 수 밖에 없는 현실과 우리 안에 괴물에 대해서는 모른채 한다. 결국 그렌델 이후에 황금용이라는 괴물이 탄생한 것처럼 우리는 퀀트 이후에 또 다른 괴물의 탄생을 보게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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