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인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학창시절 TV에서 방영하는 흑백전쟁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어느 국경일에 특집 영화로 편성된 작품이었는데, 늦은 밤 별 관심도 없이 채널을 고정시키고 보게 되었다. 원래 채플린의 영화가 아니면 흑백영화는 싫어하는 편인데, 이상하게 그 영화는 촌스러운 느낌이 안들고 내 시선을 고정시키는 묘한 힘이 있었다. 처음에는 코메디언으로만 알고 있던 구봉서 선생님이 영화에 조연으로 출연하는 것이 더 신기해서 보기 시작했지만, 영화의 내용이나 연출은 밤에 혼자서 TV를 보는 내 눈시울을 적시게 만들었다. 이 영화 "돌아오지 않는 해병"을 본지 벌써 10년이 지나서 영화에 대해서 기억나는 것들은 단편적인 것들 밖에 없지만, 몇 몇 장면들은 아직도 새록새록 기억이 난다.
돌아오지 않는 해병 - 이만희 |
이 영화는 인천상륙작전 성공 후 북진하던 한 해병대 분대가 극한 상황에 처하면서 펼쳐지는 이야기를 보여준다. 강대식 분대의 대원들은 북진하면서 고향을 거치게 되고, 그곳에는 전쟁의 상흔들만 남아서 있다. 어느 날 중공군에 포위를 당하고 안형민 삼조 만을 남기고 나머지 해병들은 돌아오지 못하게 된다. 이 영화는 반공이데올로기가 난무하던 시대에 전쟁 속에 사람들의 이야기를 중점적으로 그려내면서 좋은 평가를 받은 작품이다. 뿐만 아니라 군의 지원을 받아 찍은 스펙타클한 전쟁씬은 지금 봐도 놀랍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전쟁 속 사람들을 통해서 전쟁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작품으로 기억된다.
"돌아오지 않는 해병"이 전쟁 속 사람들을 보여주면서 전쟁의 의미를 생각하게 만들었다면,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는 형제의 비극을 통해서 전쟁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캐릭터의 극단적인 감정 변화가 개연성을 떨어뜨리는 면이 있기는 하지만, 민족상잔의 비극이라는 한국전쟁을 형제의 비극을 통해 보여줌으로써 전쟁이 만들어내는 상처와 비극을 더 현실적으로 전달한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관객의 감정을 섬세하게 이끌어 낼 수 있는 강제규 감독의 뛰어난 연출력이 전쟁이 만들어내는 슬픔과 비극을 더 가슴에 와 닿게 만들어 주는 작품이다.
태극기 휘날리며 - 강제규 |
하루를 행복하게 살아가는 진태와 진석 형제의 삶은 전쟁과 함께 순식간에 격랑 속으로 빠져든다. 가족을 데리고 피난을 가던 진태와 진석은 대구에서 진석이 징집되면서 모든 삶이 흔들리게 된다. 진석의 징집을 저지하던 진태까지 전장으로 끌려가게 된다. 진석을 보호하기 위해 형 진태는 전장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기 시작한다. 점점 잔인하게 변해가는 진태의 모습에 진석은 점점 실망하게 되고, 두 형제는 갈등하게 된다. 하지만, 그런 갈등은 다가올 형제의 운명에 대한 시작일 뿐이다. 스펙타클한 전쟁씬으로 관객을 압도했던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로 이 영화의 전쟁씬은 우리 영화의 수준을 한 단계 올렸다고 생각될 정도로 뛰어난 작품이다.
반공이데올로기가 점점 약해지고, 전쟁의 무의미함에 대한 성찰이 높아가는 성숙한 사회로 들어갔다고 생각했는데..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시대가 점점 변해간다. 반공이데올로기를 앞세운 시대착오적인 영화들이 아직도 만들어지고 있는 현실은 그저 우습다. 어린 시절 봤던 반공만화 "똘이장군" 처럼 유치하게 극단적으로 아군을 미화하고 적군을 악으로 묘사하는 영화가 나오는 현실은 뭐라고 말해야 할까? 그래도 성숙한 관객들은 그런 영화를 외면해 버리는 것을 보면, 아직 우리 사회에 건전한 시민들이 많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국가주의나 애국주의를 앞세운 영화들의 제작소식들이 많이 들리는 현실에서 영화 "고지전"은 가뭄에 단비 같은 영화다.
영화 "고지전"은 휴전협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서로 뺐고 뺐기는 애록고지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전쟁의 무의미함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영화는 애록고지에서 사망한 중대장에게서 아군의 총알이 발견된다. 군 내부에 북한군 첩자가 존재할 수도 있다고 의심한 상부에서는 방첩대 강은표 중위를 조사를 위해서 악어 중대에 파견한다. 강은표 중위는 악어 중대에서 죽은 줄 알았던 친구를 만나게 되고, 너무나 변해 버린 친구의 모습에 놀란다. 그리고 친구와 악어중대원들의 미심쩍은 행동을 보면서 의심을 하게 된다.
고지전 - 장훈 |
이 영화는 전쟁의 의미에 대해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강렬한 메시지를 던진다. 영화 초반에 국군과 북한군의 차이를 전쟁의 이유에서 찾았던 북한군 장교가 영화의 마지막에는 다른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명확하게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악어중대원들의 강은표 중위 친구 김수혁의 모습 등 영화 곳곳에 전쟁이 인간성을 얼마나 말살 시키는지 보여줌과 동시에 무의미함을 동시에 보여준다. 단지 살기 위해서 싸워야 했던, 무정한 사람들의 모습이 너무나 슬프고 가슴 아프게 전해지는 작품이다.
영화 "고지전"은 단순하게 명확한 메시지를 던진다. 하지만, 인간의 본성이랄까 이것은 고지전이 던지는 단순한 메시지를 언제나 압도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분노의 대상을 찾고, 이데올로기를 만들어서 나와 너를 구분 짓는다. 그리고 그 구분으로 적대감 반감을 키워가면서 자기 안의 폭력성 또한 키워간다. 전쟁이라는 극단적 상황은 아니지만, 최근에 노르웨이에서 일어난 슬픈 비극은 인간이 전쟁을 만들어내는 또 다른 모습이다. 전쟁의 비극와 무의함을 보여주는 영화를 통해서 우리가 추구해야 될 것이 무엇인지를 한번 고민해 봐야 되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노르웨이 대응과 총리의 추도사는 우리와 인류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 어떤 것인지 보여준다. "테러에 대한 우리의 대응은 더 많은 민주주의와 더 많은 개방성, 그리고 더 많은 인간애입니다. 그러나 결코 순진함의 발로는 아닙니다. ... 만약 한 사람이 그렇게 큰 증오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우리 모두가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랑이 얼마나 큰지 상상해 보세요. ..." 물론 우리가 대면하고 있는 상대와 테러리스트는 다르다. 하지만, 증오가 만들어내는 비극은 결코 다르지 않으며, 우리는 이런 전쟁 영화들을 통해서 보고 느끼는 것들이다. 이젠 분노보다 더 큰 사랑으로 현재와 미래의 관계를 대비해야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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