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새벽이면 지금은 고인이 된 정은임 아나운서가 진행했던 영화음악 라디오 방송을 간간히 들었었다. 영화 음악 코너 중에 지금은 감독으로 데뷔까지 한 영화 평론가 정성일씨가 진행하는 코너를 좋아했었는데, 어느 날 정성일씨가 영화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방법에 대해서 말한 것이 인상 깊었다. "영화를 사랑하는 첫 번째 방법은 같은 영화를 두 번 보는 것이고, 두 번째 방법은 영화평을 쓰는 것이며, 마지막 방법은 영화를 만드는 것이다."라는 프랑수아 트뤼포의 말을 인용해서 들려주며 "영화를 만들어라."라는 진심어린 충고를 남겼었다. 그리고 그는 직접 영화를 만들어 영화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모습을 실천적으로 보여주었다.
나름 영화를 많이 보는 편이지만, 영화를 사랑한다고 쉽게 말하지 못한다. 우선 같은 영화 두 번 보는 것은 체질적으로 싫어한다. 아무리 감동적이고 재미있는 작품이라고 해도, 두 번 이상 반복해서 보는 경우는 거의 없다. 무료한 시간을 때우기 위해서 캐이블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딱히 볼 것도 없을 때, 영화 채널을 주로 보는데. 바로 그 때 같은 경우가 내가 영화를 두 번 보는 경우가 된다. 목적이나 의지를 가지고 같은 영화를 두 번 이상 보는 것이 아니라, 지루함과 우연이 만났을 때 같은 영화를 두 번 보게 되는 것 뿐이다.
그렇다고 내가 영화평을 쓰는 것일까? 멋모르는 시절에 영화에 대해서 평가한다고 삐딱하게 보면서 영화평이라면서 끄적였기는 했었다. 그런데 영화에 대한 제대로 된 지식, 사회나 인문학적 지식이 전무한 채, 자기 만족적인 이기적인 글들을 돌이켜 보면, 얼마나 부끄러운 것들인가? 자신의 감상을 이야기하면 그것이 영화평이라고 쉽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리뷰와 영화평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단순한 오류에서 나온 생각일 뿐이다. 요즘도 허접한 리뷰를 쓰긴 하지만, 결코 그것들을 영화평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고, 쓰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영화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즐기려고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영화를 만드는 것은 더욱 더 엄두가 나지 않는다. 한 때는 정말 엉망인 영화를 보고 "이것 밖에 못 만들어, 내가 찍어도 이거보다는 잘 찍겠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 대해서 어렴풋이 알아가면서, 아무리 영화를 못 찍는 감독이라도 결코 만만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자리에 올라가기 위해서 얼마나 영화를 사랑하고 피나는 노력을 했을지 이제는 어렴풋이 이해한다. 그래서 웬만하면 감독에 대한 직접적인 비난은 웬만하면 하지 않는다. 그냥 나와 취향이 다를 뿐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결국 나는 영화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 보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데 영화 속에서 영화를 사랑하는 꼬마들의 보면 웬지 모를 부러움을 느낀다. 어떻게 보면 아무것도 모르는 꼬맹이들이 영화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 성인을 능가하는 모습이 부럽기만 하다. 우리나라 영화에서는 보기 힘든데, 외국 영화를 보면 영화를 만드는 꼬마들의 모습이 심심치 않게 보인다. 자신이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을 즐기기를 제한 당하고, 오직 공부만을 강요당하는 우리의 현실과 다른 자유로운 모습이랄까? 스필버그를 비롯한 많은 유명 감독들은 어린시절부터 영화를 만들고 즐겼다고 하는데, 우리는 언제쯤 그런 환경이 될까 부러움으로 그런 영화들을 바라본다.
나의 판타스틱 데뷔작 - 가스 제닝스 |
영화 "나의 판타스틱 데뷔작"은 영화를 만드는 과정을 통해서 아이들의 성장을 그린 작품이다. 혼자 그림을 그리며 외로움을 달래던 윌은 마을의 악동 리를 만나면서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말썽을 부리면서 일상을 보내던 리는 윌에게 영화를 만들자고 제안하고, 윌의 그림 소재 '람보의 아들'로 그들만의 영화 만들기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둘이서 영화를 만들면서 이런 저런 에피소드를 겪게 되고, 둘의 우정도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한 열정적인 모습이 어른들의 눈에는 무모해 보이기도 하지만, 그 때 그 시절의 그 모습이 얼마나 사랑스럽고 순수한지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연기 경험이 전무한 아역배우들의 풋풋한 연기 또한 매력적인 작품이다.
슈퍼 에이트 - |
영화 "슈퍼 에이트"는 스필버그와 J.J 에이브람스의 만남으로 화제를 모았던 작품이다. 이 영화는 원래 정체불명의 생명체가 등장해 일어나는 혼돈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영화를 만드는 꼬마들과는 상관없는 작품인 것 같지만, 영화를 이끌어 가는 주인공들이 영화 속에서 영화를 만드는 아이들로 나온다. 영화에 대해서 진지한 고민을 하면서 시나리오를 고민하고, 영화에 대한 다양한 특수효과와 분장을 연구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아주 귀엽고 사랑스럽다. 영화 제목 "슈퍼 에이트"라는 것도 슈퍼 8mm 카메라를 말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제목과 소재는 연관이 없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제목에서 아이들의 영화에 대한 사랑이 인상적으로 보여진다.
인적이 드문 기차역에서 영화 촬영을 하던 아이들은 트럭과 열차가 충돌한 참혹한 사건의 현장을 목격한다. 사고 현장에서 다행히 큰 피해를 입지 않은 아이들은 트럭의 운전사가 과학 선생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도움을 주려하지만, 이 사건을 비밀로 하지 않으면 가족까지 위험해진다는 과학 선생님의 충고와 강요에 이 사건을 비밀에 붙인다. 열차 사고 직후 군인들이 사건 현장을 장악하고, 마을에서는 이상한 사건들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사고 당시 부서진 카메라의 필름을 현상한 아이들은 필름 속에 담긴 정체불명의 생명체를 보게 된다. 군대는 마을 사람들을 한 곳에 격리 시키지만, 아이들이 괴생명체에 납치 당한 앨리스를 구하기 위해서 모험에 나선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는 스필버그나 JJ 에이브람스라는 이름에 비하면 상당히 실망스러운 작품이다. 이야기도 연출력도 기대에 못 미친다. 관객을 낚시하는데 탁월한 에이브람스의 낚시질은 이제 한계에 다다른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로 관객의 기대감을 무너뜨린다. 무너진 기대는 실망으로 변해 이 영화가 더 재미없게 느껴지는 것 같다. 반면 영화의 분위기나 느낌은 스필버그의 전작 E.T나 미지와의 조우 같은 느낌이 상당히 강하게 풍긴다. 이 영화의 감독이 JJ 에이브람스가 아니라 스필버그라는 느낌이 들 정도다. 그 익숙함이 반갑기도 하지만, 이제는 촌스럽다는 느낌도 크다.
오히려 엔딩 크레딧과 함께 나오는 아이들의 영화가 인상적이다. 익숙한 이야기의 짜집기에 어설픈 연기나 연출은 종종 웃음을 짓게 만든다. 그것을 보면서 문득 SF 영화가 아니라 영화를 만드는 아이들이 겪는 모험영화였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영화 "구니스"같은. 그럼 영화에 대한 아이들의 사랑과 열정은 더 매력적으로 살아나고, 더 재미있는 영화가 되지 않았을까? 이 영화 속에서 빛나던 아이들이 더 인상적이고 기억에 남았을 것 같다.
비카인드 리와인드 - 미셸 공드리 |
영화 "비카인드 리와인드"는 감전사고를 당해서 몸에서 자성을 띠게 된 제리가 친구 마이크가 일하는 비디오 가게에 들러 자성으로 비디오를 지워버리게 된다. 주인에게 들키지 않고 고객이 원하는 영화를 직접 제작해 빌려주기 시작한다. 입소문을 타면서 제리와 마이크는 일약 스타가 된다. 이러한 인기는 어느 순간에 위기에 직면한다. 제리의 행위가 저작권법에 걸리게 되면서 비디오 가게는 폐업해야만 하는 위기에 처하게 된다.
영화 "비카인드 리와인드"를 보면 영화 만드는 것이 뭐 어려울까 하는 생각을 잠깐 들게 한다. 보통 영화는 100여명의 스탭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여서 오랜 시간에 걸려서 만들어 진다. 이 영화처럼 카메라 하나만 있으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잭 블랙이 연기한 제리를 보면 "영화 그까이꺼"라고 생각하게 된다. 괜히 어렵게 생각해서 자신의 한계를 정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프랑수아 트뤼포가 말하는 영화를 사랑하는 법은 영화를 만들어야 영화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를 진정으로 사랑해야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뜻 일텐데, 영화를 만드는 것이 마치 필요조건으로 생각한 것 같다. 영화를 사랑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다시 열정을 되살릴 수 있는 작품들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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