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들리는 입소문이 괜찮아서 오래 전부터 보려고 마음을 먹고 있던 영화인데, 이런 저런 핑계로 계속 미루기만 했었다. 우연히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작가를 만나다"라는 행사에 이 영화 "무산일기"가 기획되어 있는 것을 보고 바로 예매를 했다. 이번 기회가 아니면 극장에서 볼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고, 감독과의 대화 시간도 포함되어 있기에 영화를 깊이 있게 알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특히 적은 수의 극장에서 개봉하는 독립영화는 정말 큰 마음 먹지 않으면 쉽게 보러 가지지 않는데 보야겠다는 결심을 했을 때 바로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어영부영 시기를 놓치기에.
개인적으로 올해 독립영화 쪽에서 큰 호평을 받았던, "혜화, 동"이나 "파수꾼" 같은 영화들는 상업영화가 별 차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연기나 연출에서 뛰어난 작품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무산일기"에 대한 입소문을 들었을 때 개인적 기대치도 올해 봤던 그 두편의 영화 정도(?)랄까? 한마디로 하면 기존 상업영화에 가까운 재미와 영상 그리고 연출을 보여줄 것으로 기대했었다.
그런 기대는 영화의 시작과 함께 바로 깨진다. 주제가 워낙 무거워서 그런지 몰라도 러닝타임 내내 풍겨오는 묵직한 분위기는 차치하더라도, 영화 초반 보여지는 승철이라는 캐릭터의 답답하고 재대로 표현되지 않는 듯한 모습은 앞의 두 영화에 비해서는 거칠고 부자연스럽다는 느낌을 강하게 풍긴다. 전문 연기자가 아닌 박정범 감독이 직접 연기를 하고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경철이나 숙영이라는 인물들에 비하면 연기력이 떨어진다는 인상이 영화 초반부터 진하게 풍긴다.
하지만, 승철이라는 캐릭터와 박정범 감독의 연기에 대한 거부감은 시간이 지나면서 공감으로 바뀌게 된다. 승철이라는 캐릭터가 가지고 있는 과거와 성격이나 환경 등이 조금씩 표현되면서 이해되기 시작한다. 배가 고픈 상황에서 음식을 두고 친구와 싸웠는데 나중에 그 친구가 죽었다고 고백하는 장면은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해서 이런 저런 고생을 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스스로 위축되고 죄의식에 찬 승철이라는 캐릭터에 점점 연민을 느끼게 된다.
아마도 경철이나 숙영이라는 캐릭터가 승철과 크게 비교되면서 그렇게 되는 것 같다. 철저하게 자본주의 사회에 물들어서 속물적인 경향이 강한 경철이나, 진실한 기독교 신자이면서도 현실의 호구지책을 위해서 접대 노래방에서 일하는 숙영이나, 모두 승철과 비교하면 세속적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승철은 자신의 살인을 지독한 죄의식에 차서 고백하면서도 세상의 주변부에 머무르는데, 그의 모습이 단순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단순한 아웃사이더가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세속에 타락하지 않은 순수한 결정체로 보이게 만든다. 팔리지 않아서 주인에게 버림받고 승철의 가족이 되는 백구 또한 그런 상징성을 보여주는 것 같다.
비록 이 영화가 탈북자를 다루는 영화지만, 단순하게 탈북자만을 위한 영화라고 볼 수 없는 것 같다. 이 영화는 살인자인 승철을 통해서 과연 우리 사회는 승철 만큼 순수한가를 묻는 것 같다. 누가 감히 승철에게 돈을 던질 수 있냐고 묻는 것 같다. 진실하게 종교를 믿으면서도 현실적인 문제 앞에서 종교적 순결성에 죄를 짓는 숙영과 비교해보면 더 그런 생각이 들게 만든다. 또 다른 존재 백구를 통해서 누가 더 순수한가를 고민하게 된다. 순종이 아니라는 이유로 생명의 값어치 조차 없어지는 백구를 통해서 말이다.
이 영화가 끝나고 크레딧이 올라가도 관객의 가슴을 무겁게 내리 누르는 것은 단순히 영화가 제기하는 이런 물음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속에 점점 순응해가는 승철의 모습이 가슴을 누른다. 순수함이 살기 힘든 사회, 세속적으로 변하지 않으면 살기 힘든 우리 사회의 모습을 승철의 변화를 통해서 보여주기 때문이다. 사실 경철의 돈을 훔쳐서 사회에 적응해 나가려는 승철의 모습은 그렇게 나를 먹먹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경철이라는 캐릭터가 워낙 강해서 승철과 극단적으로 대비되기 때문에 승철의 행동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이해하고 공감하게 된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 엔딩이 보여주는 상징성이 너무나 강렬하게 큰 인상을 남긴다.
자동차에 치어서 죽은 백구의 모습을 가만히 서서 바라보는 승철의 모습을 롱테이크로 담은 이 장면은, 승철이 교회에서 자신이 친구를 죽였다는 죄를 고백하면서 했던 대사를 오버랩되게 만든다. 그 때는 무의식에 저질렀던 죄에 대해서 나중에 깊은 죄의식을 가지게 되는 장면이었다면, 이 엔딩은 승철이 가지고 있는 죄의식과의 결별을 뜻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죽은 백구의 모습이 영화 속에서 순수했던 승철의 모습이고, 그것을 바라보는 승철은 자신의 순수함이 죽었음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단순히 탈북자들의 어려운 삶을 넘어서 자신의 순수함을 죽이지 않으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속에 적응하기 쉽지 않음을 보여주는 잔인한 이 영화는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도 한참 동안 가슴이 답답하고 먹먹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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