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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참여연대, 정운찬 그리고 정체성. 책 "정체성과 폭력"을 읽고.

by 은빛연어 2010. 7. 11.
 

정체성과폭력운명이라는환영
카테고리 정치/사회 > 사회학 > 사회학일반 > 사회비평에세이
지은이 아마르티아 센 (바이북스,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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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라의 총리라는 분이 국회에서 시민단체에 대해서 과격한 언사를 쏟아 부은 적이 있다. 문제는 참여연대가 정부의 천안함사건 조사와 발표에 대해서 의심이 가는 부분에 의문을 제기하는 서한을 UN 이사국들에게 보냄으로써 시작되었다. 국내에서 조차 조사결과와 발표에 많은 의문을 제기하면서 정확한 자료의 공개와 해명을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소리들을 모두 무시하면서 문제를 외교문제로 끌고 가버린 정부의 밀어붙이기로 인해서 발생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총리와 정부 관계자 그리고 소위 보수단체라고 하는 사람들은 애국심과 정체성을 들먹이기 시작한다.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황우석 사태와. 과학적 업적과 경제적 가치를 들먹이면서 진실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애국심을 들먹이면서 협박까지 했던.

 

 "애국심이 있다면 유엔에 가져가 우리 조사 결과가 잘못됐다고 말하지 못했을 ", "어느 나라 국민인지 의심이 생긴다."라는 정운찬 총리의 발언을 비롯해서, 익명의 당국자가 말했다는 "이적행위나 마찬가지"라는 발언을 보노라면 마치 지독한 냉전시대로 돌아간 듯할 뿐만 아니라, 마치 파시즘이 부활하는 같은 느낌이 든다. 동안의 지난한 과정을 거치면서 바뀌어간 세상이 순식간에 뒤로 후퇴해버린 같다. 이분법적 시각으로 편을 나눠서 동지와 적으로 구분해 공격을 일삼는 행태. 참여연대의 행위가 옳고 그름을 떠나서 기본적으로 한나라의 총리라는 사람과 정부당국자라는 사람이 취할 있는 행위란 말인가? 자신과 다른 목소리에 대해서 귀를 기울이기 보다는 지독한 낙인을 찍어버리는 행위를 그것도 나라의 국정을 책임지는 총리의 입에서 나온다는 것이 한심스럽다.

 

 그런데 정운찬 총리는 애국심과 정체성에 대해서 그렇게 발언할 자격이나 있을까? 대정부 질문에서 그는 그의 애국심과 정체성에 의심이 가는 답변을 내놓은 적이 있다. 그는 731부대에 대한 질문을 받고, "항일 독립군인가요."라고 말한 것이다. 최근과 같이 역사적 교육이 등한시 되는 시대에 학교를 다녔다면 그런대로 이해를 하겠지만, 전직 대학 총장, 국내에서 영향력 있는 경제학자라는 그의 이력과 정체성을 생각해볼 , 상식적으로 나올 없는 대답이다. 그는 정말 대한민국의 역사를 제대로 인식하고 국가에 대한 정체성과 애국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까? 역사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이 나라의 총리로써 과연 자격이 있는지에 대해서 의문이 생긴다.

 

 정운찬 총리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정부를 감시하고 견제하는 것이 중요한 역할 중에 하나인 시민단체가 정부의 조사결과에 의문을 제기하는 행위가 애국심과 정체성을 부정하는 행위일까? 여기서 우리는 시민단체의 기본적인 역할과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있다. 시민단체가 어느 나라에 속해 있는 이상, 그가 속한 나라의 정체성을 공유하고 있다. 이것이 정부와 보수단체들이 참여연대를 공격하는 이유라고 있다. 하지만, 시민단체는 태생적으로 정부를 감시하고 비판하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정부의 조사에 의문을 제기하고 UN 문제를 지적하는 서한을 보내는 것은 그들의 정체성에 부합하는 정당한 행위라고 있는 것이다.

 

 참여연대를 봤을 , 단순하게 생각해도 2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집단이라고 있다. 나라의 국민으로써 정체성과 시민단체로써의 정체성을. 그럼에도 사람들은 하나의 정체성만으로 규정하려고 한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낙인을 찍어서 상대방에 대해서 폭력에 가까운 행위를 보이기도 한다. 이제는 역사의 유물이 되어버린 알았던 이념의 과잉과 편가르기는 여전히 우리사회를 배회하면서 부활의 기회만을 노리고 있는 같다. 그런데 정체성이라는 놈이 무엇이기에 사람들은 정체성으로 서로를 구분 지으려고 할까? 사람에게 과연 하나의 정체성만 있는 것일까?

 

 사회적 동물이라는 인간을 생각해보면, 자라면서 인간은 많은 사회적 환경의 영향을 받으면서 하나의 인간으로 성장해 간다는 것을 있다. 가장 영향력을 미치는 부모님에서 시작해서, 종교를 믿으면 종교의 영향을 받기도 한다. 가풍이라는 것이 집안의 고유한 정체성을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신앙심의 정도에 따라서 개인의 정체성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그렇게 많은 영향들을 받으면서 우리는 알게 모르게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존재로 성장해 간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의 생각이 다양하고 생활의 방식들이 다르다. 결국 정체성이라는 것도 어떻게 보면 만들어진 신화에 불과할 수도 있는 것이다. 많은 영향 중에서 어느 하나만 집어내어 규정 짓는 것은 단순한 구분 짓기 이상은 아닌 것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끊임없이 정체성에 대한 구분 짓기 또는 선택을 강요 받는다. 그런 행위로 인해서 서로를 구분하는 것이 마치 당연하다고 생각하듯이.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행위가 만들어내는 타자의 구분과 배제 그리고 과잉으로 인해 발생하는 폭력이다. 참여연대를 향해 보여준 보수단체의 폭력은 어쩌면 약과다. 역사에서 우리는 잔인한 것들을 많이 봤었으니까. 자신들과 조금 다르다는 이유로 마녀로 몰아붙여 많은 사람들이 죽였던 중세의 모습이나, 2 세계대전 당시 민족이 다르다는 이유로 학살 당해야만 했던 유대인들이나. 현재도 여전히 종교와 민족을 두고 더한 폭력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니까.

 

 여기에 대해서 아마르티아 센은 "우리가 이른바 독보적인 정체성을 갖게 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의식이 길러지면 폭력은 더욱 조장된다. 이는 분명 우리에게 광범위한 압력을 가한다. 이른바 독보적 정체성을 강요하는 것은 흔히 분파적 대결을 조장하는 "격투기" 결정적 요소다."라고 한다. 그는 책을 통해서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 비판하고 있다. 사람들이 종교에 대해 가지는 선입견과 편견에 대해서 비판하려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종교를 기준으로 문명을 나누어 평가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조국인 인도를 예로 들면서 인도가 비록 힌두교의 나라이지만, 1 명이 넘는 무슬림들이 살고 있는 곳이라며 "문명의 충돌" 반박한다.

 

 그러면서 "문명을 구획화하는 것은 인간을 이해하는 다른 방식들, 더욱 풍부한 방식들을 억압함으로써 사회 분석에 지나치게 개입하는 현상이다. 그것은 문명 충돌의 북소리가 울려 퍼지기도 전에 이미 세계 사람 거의 모두를 잘못 이해하는 토대를 제공한다."라고 말한다. 그는 " 인간의 정체성이란 수많은 개별 형식을 취할 있으며, 사람들이 자신을 이해하는 방법을 결정하는 있어, 자신이 어느 특정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태어난 대해 어느 정도의 중요성을 부여할지 결정하는 있어 이성적으로 추론해야 함을 인식하는 또한 중요하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다원적인 정체성을 인정해야 하고, 그런 인식을 바탕으로 이성적 추론을 통해서 각각의 정체성에 중요성을 부여하는 행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많은 역사를 통해서 이미 단일한 정체성의 강요로 인한 비극과 슬픔 그리고 고통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누군가에 의해서 단일한 정체성을 강요 받고 있고, 때론 우리가 누군가에게 강요하기도 한다. 국민 통합에 앞장서야 정부가 정체성을 강요하는 것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 반복해서 우리는 이런 일들을 겪어야 하는 것일까? 끊임 없이 정체성을 확인하고 때론 확인을 받으면서 어딘가에 소속감을 느껴야만 하는 사회적 동물이라서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단순한 생각이겠지만, 중요한 것은 점점 다원화 되어가고 있는 세상에서 다원성에 대한 끊임없는 인식과 이해가 아닐까. 누군가가 획일화된 정체성을 강요해도 정확하게 다원적 정체성이라는 것을 인식할 있을 테니까. 


정체성과 폭력 - 10점
아마르티아 센 지음, 김지현, 이상환 옮김/바이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