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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설

최진실 사건의 교훈은 악플문제가 아니라 자살문제다.

by 은빛연어 2008. 10. 7.
 

  스타의 자살을 계기로 인터넷 악플에 대한 제재 여론이 뜨겁다. 방송장악에 이어 인터넷 여론에 대해서 제갈을 물리려고 노력하던 딴나라당은 이번이 기회다 싶어서 최진실이라는 이름을 앞에서 일명 "최진실법" 제정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유가족들의 반발로 이름에 고인의 이름을 사용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물러섰지만, 방송장악을 시점으로 모든 언론에 대해서 검열하고 제갈을 물리려는 그들의 포퓰리즘적인 수작에 많은 국민들은 넘어간듯하다. 20여년간 톱스타의 자리를 지키던 배우의 갑작스런 자살이 만들어낸 일방적인 여론몰이는 국민들이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보게 만들고 있다.

 

 "블라인드 스팟"이라는 책의 저자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 숲을 보지 못하는 맹점'이라며 한국의 사례를 설명하고 있다.  '대치동 엄마들'이라는 신문기사를 인용하면서 교육열이 높은 대치동 엄마들을 비난하는 것은 핵심을 놓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렇게 높은 교육열에 대해서 대학 입시에 대한 극심한 경쟁, 학벌이 사회적 지위를 좌우하는 것과 같은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지적한다. 그리고 문제의 해결에 대해서도 유별나게 교육열이 높은 엄마들에 대한 비난 아니라 사회의식과 시스템의 변화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한다.

 

 최진실의 자살사건에 대해서 대다수의 쓰레기 언론들은 악플에 모든 원인을 돌리고 있다. 하지만 악성루머의 근원지는 인터넷의 악플이 아니라 주가조작이나 거짓정보로 주식시장을 흔든 피해를 야기했던 증권가의 찌라시라는 것이다. 찌라시에 대한 규제와 처벌에 관해서는 여러 문제시 되면서 경찰이 수사를 하고 처벌을 하겠다고 했었지만, 찌라시는 사라지지 않고 최진실에 대한 악성루머를 생산해 냈다.

 

 하지만 악플이나 찌라시가 만들어내는 악성루머의 폐해는 나무일 뿐이다. 개인이 가지고 있는 많은 원인의 일부일 뿐이다. 특히 대중의 관심을 받는 연예인을 중심으로 악플이나 악성루머가 원인이 되는 경우가 많을 뿐이다. 100이라는 점수에서 자살한다고 가정해서 최진실을 경우를 대입해보자. 최진실의 경우 이혼으로 인해 우을증이 생겼다고 했으니 그것을 60점이라고 하고, 언론에서 말하는 인기유지에 대한 스트레스에 대해서 30이라는 점수이고, 마지막 100점에 도달하기 위해 10점의 스트레스가 악플이나 악성루머라면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은 악플이라고 있을까? 물론 점수는 내가 임의로 매긴 것이지만, 누가 함부로 그녀가 받은 스트레스 지수를 함부로 숫자로 평가할 있을까? 결국에는 전체적인 문제를 심도있게 접근해야 함에도 저질언론과 대중들은 귀와 눈을 즐겁게 하는 선정적인 것에 집중할 뿐이다. 아주 사소한 나무 그루에만.

 

 우리가 맹점에 빠진 것은 "스타 최진실의 자살"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문제를 " 생명의 자살" 인물에 대한 평가를 하지 않은 접근해야 됨에도 불구하고, 스타 최진실에만 집중하면서 자살이라는 문제에 대한 심도있는 접근을 하지 못하게 된다. 대한민국은 OECD 자살률 1, OECD청소년 자살률 1. 2007 자살자수만 12174명이나 된다. 결국 최진실의 자살에 대해서는 스타의 자살이 아니라 우리나라에 만연한 자살의 문제로 확대해석 해야 한다. 그것이 숲을 보는 것이다.

 

 자살문제는 숲이고 중에 최진실의 자살은 하나의 나무이다. 커다란 숲의 문제에서 접근하지 않는다면, 사회의 무관심 속에서 스스로 목숨을 포기하는 이름을 없는 사람들은 계속 늘어날 뿐이다. 물론 각자가 가진 자살의 동기와 원인에 대해서 하나하나 접근하는 것은 어쩌면 쉽지 않다. 하지만 그런 숲을 이루게 만들었던 환경에 대해서는 우리는 암묵적으로 알고 있다.  도덕이고 정의고 돈이면 무엇이든 된다는 천박한 자본주의와 국민들의 천박한 의식, 학력과 학벌만능사회가 만들어낸 치열한 경쟁사회. 흔히 말해서 점점 삭막해져 가는 사회와 인간의 인성인 것이다.

 

 일명 최진실법은 커다란 사회문제에 대한 핵심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천박한 법이다. 그런 천박한 법이 나온 것은 다수의 국민들이 스타 최진실이라는 이름 앞에서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만 바라본 맹점에서 시작된 것이고, 이를 이용한 천박한 정치꾼들이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책임을 방치한 이것으로 생색이나 내려는 것일 뿐이다. 전체 숲의 문제를 계속 방기한 하나의 나무에 집중한다고 해도 다른 나무들은 계속 썩어 들어 간다.  아무리 중범죄자에게 사형을 선고해도 중범죄자가 사라지지 않는 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