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 밤이 어둠이 만들어내는 고요함에 휩싸여 외로움을 느낄 때면 언제나 라디오는 나의 또 다른 친구였다.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DJ의 목소리는 낮을 같이 보내는 친구만큼 정겨웠고, 따뜻했으며, 나를 편안하게 만들어줬다. 얼굴도 모르는 이들의 다양한 사연들은 내 이야기 같았고, 때론 내 친구의 이야기 같았으며, 때론 내 동생 같았다. 그래서 때론 웃으며, 때론 같이 아파했다. 드라마나 영화 같은 라디오보다 더 매력적인 영상들을 넘쳐 나는 세상이다 보니, 라디오보다는 그럼 영상매체들로 밤의 외로움을 달래는 시간이 늘어났지만, 자정이 다가오면 습관적으로 라디오를 켤 때가 많다. 재미는 다른 영상매체보다 떨어질지 모르지만, 라디오에 담겨있는 인간적인 따스함과 포근함은 아직 다른 매체들이 못 따라오는 것 같다. 그렇게 난 라디오를 통해서 하루의 스트레스를 풀고, 그날의 상처에 대해서 위안을 받는다.
라디오가 영화의 주요한 소재로 등장한 영화들을 보면 라디오가 가지고 있는 인간적인 매력이 많이 부각되는 것 같다. 박중훈, 안성기 주연의 영화 "라디오 스타" 가 단순히 가수와 매니저의 이야기였다면 그렇게 감동적인 작품이었을까? 그 영화는 가수가 진행하는 라디오에 얽힌 수 많은 사람들의 인간적 매력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지면서 만들어진 진한 감동이 아니였다면 그저 평범한 영화였을지 모른다. 만약 거기에 나왔던 인물들을 라디오라는 매체를 이용하지 않고 이야기의 개연성과 다양한 관계를 설정하려 했다면 2시간으로 그 많은 인간적인 매력을 다 담을 수 있었을까? 라디오라는 매체가 있었기에 개연성을 부여하기 쉬웠고, 등장인물들의 관계도 깊게 설정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라디오는 같이 듣고 있는 것 만으로 관계는 형성되고, 몇 줄의 사연 소개 만으로 개연성은 쉽게 부여할 수 있으니까.
영화 "원더풀 라디오"는 그런 라디오의 특성을 잘 이용한다. 영화의 시나리오에 현직 라디오 PD가 참여한 작품이다 보니, 현실감 있는 이야기와 에피소드들이 영화에 그려진다. 그래서 영화의 초반은 주요 인물들의 캐릭터와 관계를 설정하는 지루할 수 있는 부분임에도 라디오를 통해서 소개되는 에피소드들을 통해서 이야기의 굴곡을 만들어 넣는다. 전직 아이돌 출신인 DJ 신진아의 톡톡 튀는 캐릭터와 매니저 대근의 어수룩한 캐릭터가 만들어내는 재미로는 한계를 나타낼 수 밖에 없는 이야기의 매력을 더 북돋아 준다. 등장하는 라디오 사연 에피소드들도 재미와 감동이라는 코드를 혼합해서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영화 초반의 이야기 짜임새는 지루함을 주지 않고, 웃음과 재미 그리고 감동으로 이끈다.
이런 전개는 어떻게 보면 로맨틱 코메디라는 영화 장르를 조금 벗어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남녀 주인공이 티격태격하면서 밀고 당기는 과정을 통해서 사랑이라는 감정을 키워나가는 과정이 조금은 묻히는 것 같다. 까칠한 PD와 천방지축 DJ의 갈등이 영화 초반에만 빛을 바랄 뿐 뒤로 갈수록 그 비중이 줄어든다. 그리고 후반부에는 둘 사이의 갈등이 아니라 DJ만의 갈등이 부각되면서 영화는 주인공 신진아의 성장 드라마로 흐른다. 까칠한 PD는 조용한 조력자로 전락한다. 남녀 주인공의 매력이 넘쳐나는 로멘틱 코메디 영화를 기대했던 사람들에게는 조금은 실망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신진아의 성장 드라마로 본다면 영화의 이야기는 힘과 매력이 있다.
그런데 영화 후반부의 문제는 신진아의 설정과 갈등의 많은 부분이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한 설정과 이야기라는 것이다. 몇 달 전에 열풍을 몰고 왔던 드라마 속 여주인공과 신진아라는 캐릭터의 설정이 비슷하다 보니, 관객들은 익숙함에 영화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매력을 덜 느끼게 된다. 드라마 속 여주인공과 신진아의 캐릭터를 비교하면서 어느 것이 더 매력적인지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에. 심리학에서 말하는 초두효과를 생각해보면, 먼저 봤던 이야기가 더 인상이 깊은 것은 자명하다. 그래서 영화의 후반부는 전반부에 비해서 갈등의 폭이 깊고, 한 순간 추락해 초라해 보이는 신진아의 모습에 쉽게 빠져들지 못하게 된다.
신진아를 연기하는 이민정은 정말 톡톡 튀는 매력을 발산한다. 후반부의 갈등이 주체가 신진아이기에 어떻게 보면 이 영화는 신진아라는 인물의 성장을 다룬 드라마라는 성격이 짓다. 전반부에 천방지축이다가 후반부에 한 순간 추락해 아픔을 겪는 등 복합적인 심리적 변화를 통해서 한 인물이 진정한 가수로 발돋음 하는 과정만 보면 그렇다. 남자 주인공은 조력자 또는 주변인물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영화에서 신진아라는 캐릭터의 매력은 영화의 매력을 좌우하는 힘이 될 수 밖에 없다. 이민정은 그런 신진아를 자신의 것으로 완벽하게 표현해 낸다. 설정과 이야기의 익숙함이라는 단점을 빼면 이 영화는 이민정의 이민정에 의한 이민정의 위한 영화라고 말 할 수 있을 정도로 이민정의 연기가 매력적이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를 정리하면, 영화의 전반부는 라디오가 만들어내는 인간적 매력이 넘쳐나고, 후반부에는 신진아의 복합적인 내면을 연기한 이민정의 매력이 넘쳐난다. 단 설정과 이야기의 익숙함이 아쉽다.
원더풀 라디오 - 권칠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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