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 가는 커뮤니티에 비정규직에 관한 글이 올라왔었다. 경쟁은 사회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기 때문에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경쟁은 필연적이며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그 글의 논지였다. 적자생존, 약육강식이라는 말을 탄생시킨 다윈의 진화론에 바탕을 둔 이런 생각을 보통 다위니즘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그 글에서 전재하고 있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우리나라에서 언제부터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경쟁을 했던가? 정규직들은 비정규직이랑 같이 밥먹는 것도 싫어해서 비정규직만의 자리를 따로 구분하지 않았던가? 정규직은 비정규직이랑 출퇴근 버스에 함께 있는 것이 싫어서 출퇴근 버스에서도 서로를 구분하는 짓거리를 저지르지 않았던가?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경쟁을 했다면 승진에 차별이 없어야 하고, 월급에 차별이 없어야 하지 않은가? 하지만 현실은 비정규직은 승진을 기대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언제 잘릴지 모르는 고용불안에 시달리고, 월급에서도 정규직에 한참 모자라지 않던가. 그런데 무슨 경쟁을 하고 그런 경쟁에서 무슨 발전이 있다고 그런 전제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초등학생과 중학생을 경쟁시키면 초등학생이 중학생을 이길 정도로 발전하지 않는다. 오히려 초등학생들을 좌절감을 맞보고 일찌감치 경쟁을 포기할 수 있을 정도의 충격만 줄 뿐이다. 원래 청소년 시절에는 한 달의 차이가 지적 능력이나 체력적 능력에서 엄청난 차이를 보이기 때문에 경쟁이라는 것 자체가 될 수 없다. "아웃 라이어"라는 책에서는 스포츠 영역에서 뛰어난 선수들이 특정 달에 몰려있는 경우가 많은 것에 대해 추적한 것이 나온다. 결론을 이야기하면, 조금이라도 먼저 태어난 아이들이 그 나이 또래에서 운동능력이나 지적능력이 대체로 뛰어나다는 것이다. 그런 학생들은 학년이 올라갈수록 지속적으로 운동을 하게 되고, 반면 어린 시절부터 인정을 받지 못한 아이들은 스포츠를 그만두게 된다. 그렇게 그 시절부터 인정받은 아이들이 지속적으로 훈련과 연습을 통해서 성인이 되어서도 뛰어난 선수로 남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특정 달에 태어난 사람 중에 뛰어난 운동선수가 많을 수 밖에 없다고 한다. 같은 나이 또래에서 몇 달 생일 차이로도 능력치가 그렇게 차이가 나는 마당에, 하물며 초등학생과 중학생을 경쟁시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초등학생과 중학생의 경쟁이 말이 되지 않는 소리이듯, 정규직과 비정규직과의 경쟁이라는 것이 말이 되지 않는 것도 그런 것이다. 초등학생과 중학생 사이에는 개인의 능력으로 뛰어 넘을 수 없는 나이라는 장벽이 있듯이,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에는 제도와 환경 그리고 사회적 인식이 만들어내는 장벽 앞에서 경쟁이라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 하다. 비정규직 개인의 능력보다 비정규직이라는 신분이 경쟁이나 발전을 완전히 가로막고 있는 상황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경쟁해야 발전한다는 소리는 전혀 논리적으로도 말이 될 수 없는 헛소리일 뿐이다. 이런 논리는 5%의 괴물들이 좋아하는 소리다. 노동의 유연화를 외치는 인간들이 좋아하는 소리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경쟁이 아니다. 그런 경쟁을 통한 발전이 아니다. 결국에 그들이 원하는 노동의 유연화라는 것은 정규직의 비정규직화를 말하는 것이다. 자신이 정규직에 있다고 안심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 자신도 어느 순간엔가 비정규직으로 전락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중산층의 몰락도 줄어드는 정규직과 늘어나는 비정규직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일본에서 하류사회라는 말이 주목받은 것을 보더라도, 우리나라도 앞으로는 하류 사회로 진입할 수 밖에 없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상황을 로마시대에 비유하자면, 정규직은 로마시대의 시민이요, 비정규직은 검투사들이다. 5%의 상위층에 있는 인간들이 귀족이라고 불리는 집단들이다. 검투사들은 5%의 유희와 쾌락을 위해서 콜로세움에서 서로의 목숨을 걸고 싸움을 벌인다. 시민들도 관객석에 앉아서 그런 유희를 즐긴다. 마치 자신들도 그런 귀족이 된것 처럼 착각하면서. 비정규직의 피 터지는 경쟁을 즐기는 것이다. 정규직들이 비정규직의 처우 개선에 대해서 침묵하고 오히려 박해하는 상황을 콜로세움의 관객석에 않아서 보여주는 시민들의 광기와 비교해서 생각해보라. 얼마나 닮았는지. 시민들은 처음부터 검투사들을 자신과 같은 계급으로 보지 않는다. 시민들은 검투사들을 같은 인간으로 조차 생각하지 않는다. 비정규직에 대해 가지고 있는 정규직의 인식과 행태는 로마의 시민들과 전혀 다르지 않다.
그런데 그 검투사들의 숫자가 무한하지 않다. 목숨을 건 대결에서 패한 이들은 더 이상 검투사 노릇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새로운 검투사가 필요하게 된다. 로마시대에는 정복전쟁을 통해서 획득한 노예들이 검투사로 지속적으로 유입 가능했다. 하지만, 지금은 더 이상 전쟁과 정복을 통한 검투사 공급은 쉽지 않다. 현실적으로 두 가지의 방법이 가능한데, 하나는 외국인 노동자를 받아들이는 것과 시민들을 계급에서 탈락시켜서 검투사로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현실적으로 단일민족이라는 이상한 믿음 때문에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 많다. 그래서 노동시장을 개방하는 것은 쉽지 않다. 반면 신자유주의 사상을 물든 시민들에게 경쟁을 통한 발전이라는 주기도문만 열심히 강조하면, 시민사회에서 가장 하층에 있는 시민들을 검투사로 쉽게 만들 수가 있다. 노동의 유연화라는 것은 시민들 중에서 쉽게 검투사를 만드는 길을 만들어 놓겠다는 것이다. 앞으로 자신이 시민 계급에 있다고 해서 검투사가 될 가능성이 없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자신의 계급에서 이탈해서 검투사가 될 수 있게 변한다.
시민의 검투사화가 가능한 사회는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점점 퇴행하는 것이다. 콜로세움에서 치열하게 싸우다 죽어가는 검투사들을 대신해서 점점 더 많은 시민들이 검투사로 변해감으로써 시민계층의 두께는 점점 얇아질 수 밖에 없다.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일본에서 말하는 하류 사회, 즉 90%가 하류(검투사)가 되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귀족들은 그것에 대해서 상관하지 않는다. 아무리 시민들이 줄어들고 검투사가 늘어난다고 해서 귀족들의 부와 권력은 여전하기 때문이다. 단 한가지 위험적 요소가 있다면, 혁명의 가능성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귀족들이 장악한 언론과 미디어의 강력한 힘에 세뇌되어서 그런 혁명의 가능성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모순과 현상은 사회 구조와 제도의 모순임에도 불구하고 언론과 미디어는 그 책임을 개인의 무능으로 돌려버리기 때문에 검투사들은 스스로만을 탓할 뿐이다.
경쟁사회에 비정규직이라는 것은 경쟁을 위해 필수 불가결한 것이 아니다. 검투사들이 귀족들의 노리개이자 유희의 도구였듯, 비정규직은 5%의 특권층의 탐욕을 채우기 위한 희생양이자 착취의 대상일 뿐이다. 정규직을 위해 만들어진 탄탄한 보호 장치들 때문에 착취하지 못했던 것을 비정규직을 통해서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 비정규직이 정규직과 경쟁한다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이지만, 발전이라는 것은 더욱더 말이 안 되는 소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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