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을 위해서라면 도덕도 양심도 팔아먹던 인간들. 그들은 주장했다. 정부는 작은 정부가 되어서 규제를 최소한으로 하고 모든 것은 시장에 맡겨야 한다고. 자유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만이 경제를 발전시키고 나라를 발전시킨다고 말했다. 그들이 하는 말은 사실인 것 처럼 선전되고 과장되면서, 그저 자신의 삶에 충실하며 관심도 없던 이들을 시장에 끌어 들였다. 시장의 부가가치를 생산해서 부를 추구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끌어들인 순진한 이들의 탐욕을 자극해서 끌어들인 돈을 빨아들여갔다.
시장은 그렇게 탐욕이 넘쳐나는 도박장이 되어 버렸다. 그런 도박장에서 돈을 따는 사람은 두 부류가 있는데 초심자의 행운으로 돈을 따는 사람과 타짜들이다. 초심자들은 도박장의 속성과 생리를 잘 모르기 때문에 운이 좋게 돈을 따기도 한다. 하지만, 도박에 빠져 가산을 탕진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초심자의 행운으로 돈을 따면서 서서히 빠져든다. 그러다가 그 행운이 다 되고, 돈을 잃기 시작하면서 잃은 돈을 만회하려는 생각에 계속해서 도박장 근처를 배회하게 된다. 결국에 모든 가산을 탕진한다. 가진자들의 꼬임에 시장에 참여한 사람들도 처음에 초심자의 행운으로 돈을 벌면서, 더 쉽게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 더 탐욕스럽게 시장에 참여한다. 타짜들이 노리는 먹이감이 초심자들인 것 처럼, 탐욕스러운 시장의 먹이감 또한 그렇게 시장에 참여한 사람들이다.
시장 참여자들의 탐욕이 극에 달했을 때 결국에 그들이 쌓았던 모래성은 순식간에 무너진다. 영원할 것 같은 부는 거품이 되어서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다. 약사 빠른 가진자들은 모래성이 무너지기 전에 자신이 가진 부를 시장에서 빼버린다. 그들은 자신의 탐욕을 다 채우고 유유히 사라져 버린다. 결국에 모래성을 끝까지 잡고 있던 사람들만 피해를 입고 만다. 반면, 약사 빠르지 못했던 가진자들은 자신들이 했던 말과 모순적인 말을 한다. 정부의 개입을 요구하는 것이다. 부실화된 은행이나 채권을 매입해 달라고 때를 쓴다. 시장의 자유를 외치던 인간들은 자신의 부가 완전히 날아갈 것 같으니까 그 부를 어떻게든 살리려고 모순적인 행태를 그대로 보여준다. 그들은 자신들의 책임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시장의 붕괴는 서민경제에 큰 영향을 준다고 협박을 한다.
결국에 정부는 그들의 협박에 못 이겨서 시장에 개입하기 시작한다. 부실화된 기업들을 살리기 위해서 세금을 쏟아 붙고, 서민과 노동자들을 보하는 사회 안전망과 같은 제도들에 대해서 고통분담이라는 이름으로 공격을 가한다. 무지 몽매한 서민들은 그런 선동을 그대로 믿으며 자신들의 고통이 결국에는 좋은 결실이 될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인내의 세월을 보낸다.
하지만 결국에 돌아온 것은 가진자들의 탐욕을 위한 것이다. IMF와 함께 본격적으로 양산되기 시작한 비정규직은 점점 더 사회의 구석으로 몰려졌다. 기업의 생산성을 높이거나 신제품이나 새로운 시장을 창출해서 이익을 극대화하기 보다는 비정규직을 착취하면서 기업들과 가진자들은 이익을 높여갔다. 그런 이익은 재투자 되지 못하고, 배당금이란 이름으로 가진자들의 탐욕을 채워갔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노예부 장관이신 영희께서는 최저임금을 낮추고, 비정규직의 계약기간을 연장해야 된다고 말한다. 어떻게든 돈을 덜 주고 노예를 부리면서도 그 기간을 최대한으로 길게 가져가야겠다는 가진자들의 탐욕을 그대로 대변한다.
비정규직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내수시장의 침체는 지속될 것이 뻔하다. 적은 월급을 받는 비정규직의 소비여력은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다. 특히 자동차 같은 비싼 제품들을 소비할 계층을 점점 줄어들 수 밖에 없다. 결국에는 소득의 촉소, 내수의 침체, 다시 소득의 축소라는 악순환의 고리는 계속해서 반복될 수 밖에 없다. 이런 고리의 틀은 이미 일본에서는 몇 년 전에 "하류사회"라는 것으로 회자된 것은 물론이고, 아키하바라의 묻지마 살인사건이라는 극단적인 형태로 표출되었다. 아키하바라 사건의 당사자가 은둔형 외톨이였다는 점이 부각되고 있기는 하지만, 그가 살인을 저지르게 된 경위가 파견근로를 하던 회사에서 갑작스럽게 해고되면서였다는 점은 충분히 비정규직문제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하지만, 이 문제는 사회의 문제가 아니라 한 외톨이의 광기일 뿐이다.
우리의 탐욕부 장관이신 만수께서는 양도소득세를 인하하고, 종부세를 폐지한다고 한다. 어떻게든 가진자들의 탐욕을 채워주기 위해서 일선에서 정책을 수립하시고, 직접 집행까지 하신다. 그들이 말하는 논리는 "파이가 커야 나눠 먹을 것도 많아지지 않느냐","부자들이 돈을 써야 돈이 돌지 않으냐" 같은 괴변들이다. 파이가 커야 한다는 것은 하방침투효과를 노리는 정책이다. 즉 부가 늘어나면 서민들에게도 부가 분배된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저명한 경제학자 조지프 스티글리츠 교수와 폴 크루그먼 교수는 더 이상의 하방침투효과는 없다고 말한다. 양극화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부의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상위계층에게 부가 집중될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조지프 스티글리츠 교수는 "인간의 얼굴을 한 세계화"라는 것을 주창했고, 폴 크루그먼은 루즈벨트의 뉴딜정책 같은 사회시스템의 개혁을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부자들이 돈을 써야 돈이 돌지 않냐"는 주장은 부자들의 이너서클 안에서의 이야기 일뿐이다. 부자들이 쓰는 돈은 결국에 그들이 구축해 놓은 틀 안에서 돌 뿐이다. 명품의 소비가 과연 얼마나 많은 돈의 흐름을 야기할지 생각해 본다면 그 효과는 미약하다는 것이 자명하다.
우리의 노예부 장관이 제안하시는 최저 임금의 억제에 대해 폴 크루그먼은 반대의 주장을 펼친다. 최저임금의 인상이 필요하다고. 그러면서 최저임금 인상에 반대하는 논리에 두 가지 논리에 대해서 일침을 가한다. "일반적으로 최저임금을 인상하는 데 반대한는 두 가지 주장이 있다. 이 두 주장은 모두 많이 들어본 것이면서도 서로 모순된다. 한편에서는 최저임금을 인상하면 취업률은 낮아지고 실업률이 늘어날 것이라고 주장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최저임금인상이 임금을 올리는데 거의 아무런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연구결과에 따르면 최저임금인상은 실제로 전체적인 임금인상에 약간 긍정적인 효과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고용에 관해 좀더 알아보기 위해, 미국 최고의 노동경제학자인 버클리의 데이비드 카드 교수와 프린스턴의 앨런 크뤼거 교수의 대표적인 연구를 살펴보면, 미국에서 최저임금을 인상한 정도로는 실업이 늘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왔다."
가진자들의 탐욕이 만들어낸 신뢰의 붕괴로 많은 사람들이 고통 받고 있다. 결국에 정부가 꺼내 들 카드는 고통분담이라는 이름의 정책들이지만, 결국에 그 고통 분담이 아니라 서민들에게 일방적으로 전과하는 것에 불과하다. 무지 몽매한 국민들은 고통분담이라는 것이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할 것이고, 정부는 그렇게 강요할 것이다. 노동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마지막 보류인 노조는 무너질 것이고, 사회복지제도는 점점 더 축소될 것이다. 결국에 이것들은 가진자들의 탐욕을 채워주는 기반으로 작용할 것이고, 서민들은 다시 착취의 굴레로 들어갈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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