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시 공화국의 종말 - 김덕영 지음/인물과사상사 |
덴마크의 한 대학에서 물리학 시험 답안을 두고 교수와 학생 간의 실랑이가 벌어졌다. 기압계로 고층 건물의 높이를 재는 방법을 묻는 문제에 학생이 "건물 옥상에 올라가서 기압계에 줄을 매달아 아래로 늘어뜨린 뒤 그 길이를 재면 된다"고 답을 한 것이다. 중재를 맡은 다른 교수는 그 학생에게 "6분을 줄 테니 물리학 지식을 이용한 답을 써 내라"라고 했다. 학생이 써낸 답은 기압계를 가지고 옥상에 올라가 아래로 떨어뜨린 후 낙하 시간을 재 "낙하거리=1/2(중력가속도X낙하 시간의 제곱)" 공식에 따라 높이를 구하는 것이다. 처음에 0점을 주장한 교수는 이 답에 높은 점수를 줬다. 중재를 맡은 교수는 또 다른 답을 생각하지 않았는지 물었다. 그러자 학생은 "옥상에서 바닥에 닿도록 긴 줄에 기압계를 추처럼 매달아 흔들어 그 진동주기를 통해 건물 높이를 알 수 있다."는 등 대여섯가지 답을 제시해 교수를 놀라게 했다. 원래 문제의 출제 의도는 고도가 높아질수록 기압이 낮아지는 원리를 이용, 기압계로 지면과 건물 옥상의 기압차를 측정해 건물의 높이를 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학생은 고등학교나 대학에서 늘 같은 답만을 가르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한다. 바로 그 학생이 1922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닐스 보어이다. 보어가 당시 생각해낸 답 중에 스스로 가장 만족한 것은 "기압계를 건물 관리인에게 선물로 주고 설계도를 얻는다"였다.
- '닐스 보어의 기발한 시험 답안','데일리포스트' 2007.03.25, "입시공화국의 종말" 중에서 발췌
위의 이야기를 글로 보거나 다른 이로부터 전해 들었다면 "정말 기발하네"라는 말이 저절로 나올 것이다. 하지만 만약 내가 문제 출제했던 그 교수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십중팔구는 글 속의 교수와 똑같은 반응으로 답안에 대해서 실갱이를 했을 것이다. 그럼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교수를 한국의 선생님으로 바꿔 생각한다면, 아니 그냥 한국인의 관점에서 본다면 학생의 논리 정연하고 기발한 답에 대해서 점수를 줄 사람은 몇 이나 될까? 점수는 고사하고 학생의 해명에 귀 기울여 들어줄 사람은 몇 이나 될까? 좀 더 생각해 본다면 닐스 보어같이 기발한 대답을 생각해내고 선생님에게 자신의 정답에 대해서 똑바로 설명하고 이의를 제시하는 학생은 몇 이나 될까?
한국이라는 곳에서 교육을 받으며 자라온 사람 대다수는 자기는 닐슨 보어나, 두 명의 교수와 같은 관점과 태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제 갓 말문을 열고 세상에 호기심으로 충만해서 "왜?"나 "저건 뭐야?", "이건 뭐야?"라는 아이에게 "크면 알아"나 "원래 그래" 같은 무성의한 대답이나 아니면 정확한 답만을 가르치며, 아이의 호기심과 상상력을 말살해왔고 말살 당해왔기에 우리 내부에 저런 관점과 태도를 가진 사람은 별종이나 이단아일 뿐이다.
"객관"이라는 것이 언제나 세상의 정답이고 "주관"은 개인의 의견일 뿐이다. 학생이 해야 할 것은 공부고, 그 공부라는 것은 객관적인 것을 잘 찾아 찍는 것이다. 자신에 대한 사유와 세상에 대한 고민은 어려서는 어리다는 핑계로, 어른이 되어서는 사회라는 전쟁터에서 삶이 고단하다는 핑계로 하지 않으며, 사회와 조직이 권위에 굴복하고 맹목적으로 복종하기 바쁘다. "왜? 어떻게?"라는 것에 대한 진지한 고민보다는 "어떤 것이 이익인가?"라는 고민으로 근본적인 문제를 외면한다. 이런 사고 방식 앞에서 학생 다운 것이 무엇이고 경쟁이란 무엇이어야 하는지 교육이란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단지 경쟁의 논리만 앞세우며 모든 것을 결론지어 버린다.
세계화와 글로벌화 시대의 경쟁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전사라고 생각하고 초등학교 심지어 유치원 때부터의 경쟁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인간들이 판을 친다. 지금의 세계적 경향은 "위키노믹스"라는 신조어를 바탕으로 협업과 참여가 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알지 못한다. 수 많은 석학들의 책에서 미래의 새로운 경향과 가능성으로 리눅스의 탄생과 발전과정에서 자발적인 협업과 참여의 무한한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런 경향은 최근에 보잉 787 드림라이너의 제작 과정에서도 응용되었다고 한다. 보잉에서 전부 설계하고 제작한 것이 아니라 설계 단계부터 다른 부품업체들이 참여해서 모듈형태로 부품을 설계하고 제작함으로써 비행기의 개발과정을 단축시킴을 물론이고 성능 또한 획기적으로 개선했다고 한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전 세계적으로 조금씩 일고 있는 공정무역의 물결과 사회적 책임 즉 메세나 활동에 적극적인 기업들의 수익이 더 높은 경향은 이미 세상은 경쟁이 아니라 사회구성원으로써의 역할과 책임을 더 강조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세계적 경향을 떠나서 서로를 배려하고 도와야 하는 것을 먼저 배워야 하는 전인교육이 필요한 시기에 쓰레기 부모들은 출세와 돈을 위해서 경쟁을 강요한다. 경쟁을 하기 위해 "나는 누구인지", "나의 꿈은 무엇인지", "세상은 어떻는지" 와 같은 고민과 사색이 필요한데, 이런 과정은 부모와 사회가 결론을 내려버리고, 그냥 경쟁하라고 강요해버린다. 사육에 길들어버려 자신이 사육 당한 방법을 자신의 자식들에게 그대로 옮겨준다. 자신이 하는 짓이 사육인지 교육인지 전혀 구분하지 못한 채.
더 웃기는 것은 경쟁을 위한 장이자 경쟁을 준비시켜야 할 쓰레기 대학교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어떻게 지켜야 할지만 고민할 뿐이다. 어떻게 교육시키느냐 보다 어떻게 뽑아야 할지가 우선이고 어떤 학과과정이냐 보다 어떤 건물과 시설이 더 필요하냐에 고민한다. 학자적 양심의 문제인 논문에 대한 표절은 "관행"이라는 말도 안되는 이유로 옹하하거나 덮어두기 바쁘다. 학자로써의 의무와 교수로써의 의무보다 정치권에 줄대기에 바쁜 교수를 보면서, 학생을 잘 뽑는 것이 대학의 경쟁력이라고 말하는 것이 우습기만 하다.
이 책을 보면서 글로벌 경쟁 운운하고 서열화 얘기하는 쓰레기들은 깨닫기를 바란다. 거기에 "생각의 탄생"과 "바보 만들기"라는 책을 더해서 진정한 교육은 어떻게 되어야 할지 한 번 진지하게 고민해 보기를 바란다. 나 또한 이 책을 보면서 나 안의 쓰레기 같은 암목적인 서열화와 줄세우기 경향을 보면서 많이 반성했다. 내가 얼마나 잘 사육 되었는지 다시 한 번 알게 되었다. 다른 한 편에서는 이 책을 쓰레기라고 치부할 사람도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당신이 얼마나 사회와 세상에 잘 사육되었는지를 나타내는 증거라는 것을, 영화 "치킨런"에서 바깥세상을 알지도 못하면서 두려워하고 현재에 안주하려는 닭과 같은 인물이 아닐까 더 고민해야 될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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