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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고

공포 3종 세트 영화. 영화 "2012"를 보고

by 은빛연어 2009. 11. 15.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공포를 내면화 해왔다. 약육강식의 정글법칙을 철저하게 교육받으면서 같이 생활하고 우정을 쌓은 친구들과도 철저하게 경쟁해야 한다고 배웠고, 실제로도 그렇게 경쟁해왔다. 낙오자들에게는 철저하게 낙인을 찍어가면서, 자신은 저렇게 되지 않으리라 되새기고, 되새기며. 그렇게 청소년 시절에는 대학입시라는 관문을 향해서 치열하게 경쟁하고, 대학생이 되어서는 스펙 쌓기에 열중한다. 거기에 신자유주의라는 이상한 흐름으로 인해서 더해지면서 이제 공포의 대상은 더욱 확대되어 갔다. 국가에서 머물던 낙오나 실패에 대한 공포가 이제는 전세계가 것이다. 이제 경쟁상대는 우리가 아니라 전세계라는 미친 구호로 공포의 대상은 물론 경쟁의 대상도 바꿔 버렸다. 그런 흐름에 낙오되지 않기 위해서 영어에 목숨을 걸고, 견문을 넓혀야 한다며 조기유학에 열중한다. 하나의 인간으로서 삶은 완전히 사라지고, 내면화된 공포 속에서 아등바등 한다.

 

 내면화된 공포는 삶과 인생의 기준을 획일화 버렸다. "남들이 하는 것은 다해봐야 한다."라는 이상한 소리를 해대면서, 남들의 기준에 맞춰서 자신의 인생을 재단해 버린 것이다. 조금이라도 획일화된 기준에 벗어나는 사람에 대해서는 관용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차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배워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차이를 차별로 인식해 버린다. 차이를 이해하려고 해보지도 않고, 다르다는 이유로 따돌림을 시켜버리거나 낙오라는 딱지를 붙여버리는 것이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내면화된 공포는 점점 강화된다. 처음에는 사회와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획일화된 삶에 조금은 저항하다가도 나중에는 스스로가 순응하게 되는 것이다. 마음의 켠에서는 이런 획일화된 삶이 갑갑함을 호소하지만, 머리 속에서는 이런 호소를 철저하게 무시해버린다. 그렇게 마음과 머리의 불일치는 삶을 점점 불행하게 만든다. 그렇게 점점 삶이 불행하다고 느끼게 된다. 그러면서 변화를 갈망한다. 하지만, 변화하지 못하고 자신의 삶에 순응하게 된다. 내면화된 공포를 극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불확실성이라는 것은 다른 공포다. 특히 경제분야에서 많이 불확실성을 이야기 한다. 경제를 예측하고 이야기할 , 불확실성이라는 것은 가장 좋지 않은 요소로 꼽는다. 불확실성이 확대되면, 시장에는 공포감이 조성된다. 투자자들의 심리가 흔들리면서 경제의 변동성이 커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경제 분야에서는 리스크 관리라는 것을 중요시한다. 리스크 관리를 통해서 어느 정도 불확실성을 제거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확실성을 제거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존재하는데, 그게 정부다. 정부의 정책의 일관성이나 예측 가능함이 시장의 신뢰를 증진시키고, 불확실성이라는 것을 제거하는 역할을 한다. 미국발 경제위기가 도래했을 , 세계에서 국가들이 시장에 통화 공급을 늘리고, 위험에 빠진 은행들을 파산시키지 않고 구제한 것은 불확실성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최근도 이런 불확실성에 대한 공포를 확인 있다. 신종플루에 대한 공포는 불확실성 때문에 무서움을 극대화한다. 이전에 없었던 그리고 예측하지 못했던 신종플루는 독감보다도 낮은 치사율에도 불구하고 공포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이전에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나 경험하지 못했던 것이기에 보통 사람들이 느끼는 공포는 밖에 없는 것이다. 불확실 하다는 것은 불신의 문제를 야기하기도 한다. 예방 백신에 대한 불신으로 의사들 조차도 접종을 미루고 있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결국 불확실성에 대한 공포라는 것은 예측하고 제어할 없다는 두려움에서 시작해서, 알지 못한다는 두려움을 부각한다. 그래서 기존 지식이나 전문성에 대한 불신까지 확대하면서 공포를 키워간다.

 

 불확실성에 대한 공포 정점에 있는 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다. 우선 죽음이라는 존재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그것이 언제 어디로부터 다가오는지 수가 없다. 뿐만 아니라 죽음이라는 놈은 경험할 수가 없다. 죽음을 체험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지만, 죽음에 직면하는 순간 사람의 삶은 끝이기 때문에 원래부터 경험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다른 식으로 해결하거나 위안 받으려 한다. 사람들은 종교라는 것을 통해 죽음 이후의 내세와 구원이라는 것을 받으려 하는 것이다. 현실적인 사람들은 과학기술의 발전을 통해서 죽음을 조금이나마 희석시킨다. 생명 연장을 통해서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늦추는 방식을 취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죽음의 공포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행위를 통해서 현재의 삶에 집중할 있는 발판을 마련하는 것이다.

 

 죽음이라는 공포에서 나아간 것은 지구종말이라는 누구도 죽음을 피할 없다는 공포이다. 마야인들의 예언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2012년의 지구종말론은 고대문명의 신비스러움과 지구종말이 야기하는 죽음이라는 것이 더해서 신뢰성 있는 공포감을 야기한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재난영화"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지만, 영화 전체적으로는 공포감을 극대화한 영화다. 단지 스크린을 통해서 보여지는 영상들이 공포감 조성에 미약한 것은 관객들의 머리 속에 가상의 허구인 영화와 현실을 구분하기 때문이다. 가상의 경험을 실제의 경험으로 현실화 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영화는 영화 초반은 죽음의 공포를 극대화 했다고 있다. 도심이 지진으로 흔들리고 빌딩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장면은 관객들에게 현실감 있게 다가간다. 왜냐하면 관객들에게 익숙한 도시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함으로써 간접 경험을 극대화한 것이다. 영화 초반부에 나오는 도심붕괴 장면에 비해서 후반으로 갈수록 영화의 힘이 떨어지면서 공포감이 약하게 표현된다. 화살이 폭발하는 장엄한 장면은 영화의 스케일을 보여줄 정도의 장면이지만, 영화 초반을 압도하지 못한다. 영화 마지막에 생존의 위기에 직면한 사람들의 모습에서도 긴장감이나 공포가 떨어진다. 왜냐하면 그런 장면들은 관객들에게 익숙한 공간도 쉽게 경험할 있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는 안타깝게도 종말과 죽음에 대한 공포를 영화 초반부에서만 쏟아 부은 꼴이다.

 

 그렇다고 영화 속에 담겨있는 공포가 끝나는 것이 아니다. 영화 속에는 죽음과 종말에 대한 공포만 있는게 아니다. 자연의 힘에 의해 무기력한 인간의 모습을 통해서 죽음이라는 공포를 보여줌으로써 시작한 영화는 자연이 아닌 인간이 만들어낸 공포를 하나씩 보여준다. 압도적인 자연의 파괴적인 앞에 인간이라는 존재는 나약하기에 통제할 없는 공포보다는 통제할 있는 공포를 제어하고 추구하려는 것이 인간의 성향이기에 이런 성향에 맞춰진 하다. 그래서 영화는 재앙 속에서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는 우리 내부에 있는 공포를 보여준다.

 

 우선 영화는 돈에 대한 공포를 보여준다. 경제위기가 발생해도 자연재해가 발생해도 가장 많은 피해를 입는 쪽은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실제로도 자연재해로 피해를 입거나 사망하는 사람들의 다수가 언제나 가난한 사람들이다. 자연은 모든 인간에게 평등할 같지만, 실제로는 자연도 인간이 가진 부에 따라서 차별하는 것이다. 영화는 그런 차별을 완벽하게 보여준다. 10억유로의 돈을 지불한 사람만이 방주와 같은 배를 탈수만 있는 것이다. 워낙 어마어마한 돈이기에 실감이 보통사람은 쉽게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의 액수인데, 돈을 가진자와 못가진자의 차이를 완벽하게 보여준다. 보통은 빈부의 격차, 가난한 사람들의 비참한 삶을 통해서 돈의 공포를 보여주지만, 영화는 인간에게 중요한 생존이라는 문제도 돈에 의해 쉽게 좌우됨을 보여줌으로써 공포감을 극대화한다.

 

 영화는 중반에 돈에 대한 공포에 방점을 찍는데, 방주가 있는 중국으로 가다가 추락한 잭슨 일행이 중국군의 헬기의 도움을 받을 보여준다. 이미 일행 10억이라는 돈을 지불한 사람은 도움을 받지만 그렇지 못한 잭슨과 가족들은  도움을 받지 못한다. 케이트가 돈을 줘서라도 어떻게 해보라고 잭슨에게 말하지만, 잭슨은 "10억유로 있어?"라는 말로 돈에 대한 공포를 보여준 것이다. 하지만, 에이머리 감독은 돈으로 사람을 차별하는 것에 대한 거부반응으로 방주를 만드는 노동자로 일했던 중국인 가족들을 보여준다. 잭슨의 가족들은 중국인 가족들의 도움으로 방주에까지 무사히 도착하고 비밀 통로를 통해서 방주에 무사히 들어가게 것이다. 과정을 통해서 10억유로를 지불하고도 방주에 타지 못한 졸부의 모습을 비춰주면서 돈에 대한 공포를 조금이나마 희석시킨다.

 

 영화에서 보여지는 마지막 공포는 권력의 공포이다. 영화 초반부에 이미 권력자들은 자연재해의 발생가능성을 알고 있다. 그리고 막거나 피할 없음을 알고, 인류의 보존이라는 방식을 택하게 된다. 그래서 권력자들은 비밀리에 방주를 건설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긴다. 권력자들은 이러한 사실을 비밀에 붙이기 위해서 살인도 서슴없다. 조금이라도 이러한 비밀에 접근한 사람들은 사고로 위장된 사건에 의해서 죽음을 맞이한다. 권력자들은 이러한 사실이 국민들의 귀에 들어갔을 초래할 혼돈과 혼란을 우려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자신들의 권력이 무너지는 것이 두려운 것이고, 자신들에게 우선적인 선택권이 있는 방주탑승 권한이 침해 받을 것을 두려워한 것이다. 그렇게 영화는 중반까지 권력자들이 가진 힘과 아무런 사실을 알지 못하고 죽어가는 국민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를 통해서 권력의 공포를 보여준다. 권력을 가진 자와 가진 자를 극명하게 보여주면서.

 

 권력의 공포는 나중에 돈의 공포를 압도함을 보여준다. 방주 척이 고장 나면서 계획했던 수용인원들을 모두 수용하지 못하는 현상이 발생한다. 이미 권력자들은 방주에 오르지만, 10억이라는 돈을 지불한 졸부들 많은 수는 방주에 탑승하지 못하게 것이다. 권력자들은 자기 생존을 위해서 그들을 포기하려 한다. 결국 권력은 돈에 앞선다는 것은 명확히 보여준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이런 공포에 대해서 사랑을 주장한다. 애드리언 박사는 그것을 주장하면서 각국의 수장들 권력자들을 설득한다. 권력자들은 결국 애드리언의 설득에 동의를 하면서 남아 있던 모든 인원을 방주에 탑승 시킨다. 하지만, 결국에 과정 자체가 권력자들의 힘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보여준다. 아무리 애드리언 박사의 설득이 있었다고 한들 그들의 결심이 없다면 돈있는 사람이라도 그냥 죽을 운명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게 영화는 죽음에 대한 공포, 돈에 대한 공포, 권력에 대한 공포, 세가지 공포를 엮어서 보여준다. 인간의 힘으로 어쩔 없는 죽음에 대한 공포는 감독 또한 성찰하거나 또는 대안적인 인식을 보여주지는 못한다. 나머지 가지 공포, 돈에 대한 공포와 권력에 대한 공포에 대해서는 다른 대안적 모습을 제시하려고 하지만, 너무나 뻔해 보인다. 특히 돈에 대한 공포를 권력에 대한 공포를 통해서 압도해 버림으로써 감춰버린 것은 영화가 거대 자본이 들어간 블록버스터 영화라는 명확한 한계와 세계의 절대권력 미국에서 만들어진 영화라는 한계를 동시에 보여주는 같다. 그렇게 영화의 결론은 너무나 미국 헐리우드 영화의형성안에 갇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