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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고

재미있는 풍자와 오락성을 갖춘 영화 하지만 아쉬운. 영화 "전우치"를 보고.

by 은빛연어 2010. 1. 8.
 

 '범죄의 재구성'이나 '타짜' 보면서 좋아하게 최동훈 감독. 그가 한국형 히어로 영화인 "전우치" 만든다고 했을 때부터 상당히 기대를 가지게 되었다. 제작에 들어간다는 기사를 접하고부터 개봉일을 하루하루 꼽아가면서 기다리다, 10월에 개봉하기로 했다고 12월에야 개봉한다고 했을 , 편으로는 기다림이 길어진다는 실망감과 다른 편으로는 제작 기간이 늘어난 만큼 완성도는 높아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동시에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너무 기대가 컸기 때문일까? 분명 영화는 오락영화로서의 충분한 완성도와 재미를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보기에는 많이 부족하게 느껴졌다. 내가 기대했던 것은 최동훈 감독이 이전 작품에서 보여준 연출력인데 반해서, 영화에서는 최동훈 감독의 개성이라고 불리는 것들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결국 영화 "전우치" 최동훈의 "전우치" 아니라 최동훈이 만든 "전우치" 되어 버렸다.

 

  영화에는 최동훈 감독의 개성은 많이 존재하지 않지만, 영화 캐릭터들의 설정이나 묘사는 매력적이다. 아무리 오락 영화라도 사회비판적 풍자와 묘사를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캐릭터를 중심으로 해서 영화를 감상한다면 다른 매력이 존재한다. 이야기는 전우치를 중심으로 흘러가지만, 특히 주변부의 인물들에 집중해서 봐야 한다. 특히 영화에서는 과거나 현재의 정치인들을 제대로 풍자한다. 과거의 풍자가 멋진 것은 절대권력이라고 있는 왕을 멋지게 조롱하는 전우치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현대의 풍자는 매력이 덜한대, 전우치의 대사를 통해서 과거나 현재나 위정자들은 변하지 않았다 식으로 간단히 처리 해버린 것이 조금은 아쉽다. 망나니에 천박지축인 전우치가 고위 공직자들을 조롱함으로써 정치인들의 수준이 그런 전우치 보다 못하다는 것도 보여주기는 하지만, 그것 또한 임금 면전에서 조롱하던 모습에 비해서 강도가 많이 약하다.

 

 망나니 전우치 부패 정치인의 대비는 사적 영역의 부패와 공적 영역의 부패의 차이를 보여준다. 이상하게도 우리나라의 국민성은 사적 영역의 부패를 커다랗게 문제를 삼는다. 연애인들의 스캔들이나 부정은 크게 문제 삼으면서도, 정치인들의 부패나 문제에 대해서 털어서 먼지 나는 사람 없다는 식으로 관용한다. 그것은 이미 얼마나 많은 부패를 저질러야 정치인의 자리에 오를 수가 있다는 것은 머리로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공적 영역에서의 부패에 관용적인 것은 이것은 어쩔 없다는 자포자기의 심정 또는 잘못을 바꾸려 노력이 권력 앞에서는 어김없이 무너지는 유전무죄 무전유죄 현상의 지속적인 학습에 따른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영화는 묻는다. 어느 것이 부패한 것이고 문제인지를. 망나니 전우치인가 아니면 부패한 정치인인가라고.

 

 그러나 영화는 커다란 부패한 정치인을 조롱해서 보여 주는 카타르시스에 한계를 가지고 있다. 부패한 정치인의 묘사가 미약하다. 영화가 설정하고 있는 전우치의 라이벌이 정치인이 아니기 때문에 그냥 흘러가는 풍자의 수준에서 머무르기 때문이다. 화담이라는 존재가 정치인이라는 존재보다 힘과 위력을 가지고 있고, 악랄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정치인에 대한 풍자가 묻혀버린 것이다. 그러다 보니 관객들은 화담이라는 악에 감정이입을 하게되고, 정치인의 풍자에 대해서는 감정이입을 없게 만든다.

 

 이렇게 되면 주목해야 것은 전우치와 화담과의 대결이다. 김윤석이 연기한 화담이라는 캐릭터가 타짜의 "아귀"같은 악랄함은 덜하는 것이 조금은 아쉽게 다가오지만, 화담이 선한 도사에서 악한 악귀로 변화하는 과정의 개연성을 부여하고 있어서 극단적으로 악한 캐릭터로의 변화보다는 오히려 지금 영화에 설정된 화담의 캐릭터가 설득력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영화에서 전우치와 화담의 대결에서 긴장감이 없다. 절대 악인 악귀와 악하고 착한 전우치와의 대결이라서 그런 그런지 극단적인 감정의 대립이 없다. 담담하게 영화를 바라보게 만든다.

 

 절대악 악과 선이 공존하는 어정쩡한 존재. 그것의 대립은 우리의 정치판이다. 전우치 정치인은 인물이라는 틀을 내에서만 머물렀다면, 화담과 전우치의 대립은 인물이라는 한계를 벗어나 사회의 커다란 틀을 속에서 풍자적 모습을 보여준다. "악보다는 차악을"이란 말은 많이 들어본 말이 아닌가? 정치판에서 말을 많이 쓴다. 정치적 혐오로 국민들의 무관심이 극에 달해서 자신의 주권을 스스로 포기하는 국민들에게 외치는 구호인 것이다. 정치판의 추잡함이 만들어낸 정치혐오로 야당이나 여당이나 나물에 밥이라고 만연한 인식을 깨뜨리기 위한 하나의 자구책이기는 하지만 결코 전우치와 같은 차악의 존재성을 명확히 하지 못하고 모두가 같은 종류로 평가 받는다. 결국 우리의 정치판이 개선되기는 커녕 맹목적인 추종만 남아서 이전투구만을 반복하는 형국이다.

 

 차악으로 악을 벌한다라는 전우치적 교훈은 어쩌면 너무나 씁쓸한 우리 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 자식들이 어릴 때는 착하게 살아라고 충고하던 부모들도 자식들이 하나 나이를 먹어갈 쯤에는 자신들의 속물주의 근성과 사상을 그대로 투영시켜서 착하면 세상을 없다라고 가르치는 현실을 말이다. 선으로 악을 벌하기에는 우리사회에서 선이라는 존재는 없을 뿐만 아니라, 대중의 인식에도 그런 인식은 천연기념물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나마 우리가 사는 사회가 조금이라도 깨끗하고 아름다운 곳이 되기를 바라는 이들은 차악으로라도 악을 벌해야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대 차악 마저도 구분하지 못하고 경멸하는 사회의 풍조는 더욱 절망감을 느끼게 만든다.

 

 이렇게 악과 차악을 구분하지 못하는 우리의 어리석음을 그대로 보여주는 존재가 영화 캐릭터로 표현되고 있다. 바로 3명의 신선들이다. 신선이라면 위엄있고, 절대 선이어야 하지만, 영화의 신선들은 무능하고 멍청하기까지 하다. 선악에 대한 구분을 명확히 하지 못하는 우둔한 존재들이다. 선인들의 문제가 무엇이냐면 자기 자신들이 아주 높은 위치에 있어서 세상을 통찰하는 아주 똑똑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의식 속에서 상황 판단력을 상실한다. 화담과 전우치에 의존하게 되면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지도 못한다. 자신이 주권을 가진 국민으로 정치인들 보다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우리들과 똑같다. 정치인들의 부패에 대해서 욕을 하고 비판을 하면서도 정작 선거만 되면 자신의 주권을 맹목적으로 특정 정당만 지지하는 무식함과 말이다.

 

 특히 3명의 선인의 현대적 모습을 신부, 무당(or 점술가) 그리고 승려로 설정함으로써 이런 풍자는 정점을 찍는다. 각기 우리사회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종교적이거나 신앙적 가치들인데, 그것을 이런 식으로 풍자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이성적이지 못하고, 어딘가에 의존적인 다른 우리의 모습을 보여준다. 재미있는 것은 자신의 존재가 신선으로 야훼와 같은 초월적인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야훼를 믿으라고 말하는 아이러니 같은 대사와 상황이다. 이런 아이러니 모순 같은 상황에 우리가 살고 있고, 그런 모순을 만들어 내는 것이 우리라는 것을 보여준다.

 

 영화 "전우치"에서 제일 중요한 존재로 등장하는 것이 어쩌면 "서인경"이라는 캐럭터다. 영화 속에서는 다른 캐릭터들에 비해서 존재 자체가 너무 미미해 보일 정도 이지만. 서인경은 소심하고 개성도 없고, 정확하게 이야기 하면 무색무취의 모습을 보여준다. 없이 착하기도 하지만 때론 커피에 침을 뱉어서 자신이 맞고 있는 배우에게 가져다 주기도 정도로 현실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화담에 주술에 의해서 악인이 되기도 하지만,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는 점에서 "서인경"이라는 존재는 가장 어중간한 형태로 개성이 없는 존재다. 이러한 존재에서 감독은 우리 일반 대중들의 모습을 찾으려는 같다. , 인간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고 그냥 백지 같은 존재이지만, 어떤 것에 영향을 받느냐에 따라서 악한이 되기도 하고 선한 사람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너무나 평범한 인식을 내비치는 같아서 실망스런 느낌이 든다.

 

 이렇듯 영화는 오락적 재미와 풍자가 더해지면서 만들어진 "웰메이드 영화"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강한 인상을 남기지 못한다. 그냥 즐겁게 영화를 봤다는 정도에서 그쳐버린다. 최동훈 감독의 강한 개성은 쉽게 찾을 수가 없고, "서인경"이라는 존재를 통해서 무지한 대중들을 비판하기 보다는 이해한다는 수준에서 자신의 생각을 끝내 버린 것이다. 대중과 정치를 조롱하고 풍자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작품이다.